친구와 중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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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창훈 댓글 1건 조회 3,265회 작성일 06-11-16 17:18본문
알짜여행사 관계자 여러분 !!!
지난 8월에 20년 지기들과 부부동반하여 중국의 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여행을 가서 좋은 인상이 기억에 남아 여행기를 올립니다
알짜여행사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 광활한 대지, 중국을 가다 ▤▥▨▦▩
손 선 아
내 생애 처음 해외 나들이다. 여행 전날 두고 가는 애들 먹을 거리며 당부하는 편지를 쓰느라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수시로 일어나야 했다.
그런 내게 남편은 유난스럽다는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야 내 여행길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맘을 덜 수 있는 것을 어찌하랴.
자는 둥 마는 둥하고, 맞춰놓은 알람 시간에 벌떡 일어나 서둘러 준비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집에서 밥을 먹고 가자니까 남편은 공항에 가서 먹자며, 나를 채근했다. 사람들이 구경삼아 나선다는 인천공항에 조금 일찍 도착해, 4층 한식당에서 갈비탕과 우거지 갈비탕을 시켜 먹었다.
허나 비싼 가격에 미치지 못하는 음식 맛은 참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누구냐- 대한민국의 제 3의 성=아줌마가 아니더냐. 계산을 치루고 나오며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너무 맛없고 음식이 짜요...’
남편의 눈총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할 말은 다해 버렸다.
그리고 일행들을 반갑게 만나 출국 수속이며, 짐을 부치는 등 어수선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 후 면세점에서 쇼핑들을 했다.
다들 열심히 필요한 물건들을 샀지만, 난 아이쇼핑만 했다.
드디어 비행기에 몸을 싣고 중국으로 출발~~~~
중국 비행기는 왜 이리 흔들리는 건지, 게다가 기내식으로 나온 형편없는 참치샌드위치= 우와! 맛없어라.....
암튼 북경공항에 도착하여 현지가이드 최영훈씨와 만났다.
그리고 국가박물관 음식점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고나서, 그 유명한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천안문은 우리에게 ‘천안문사태’로 더욱 알려진 역사의 현장이여서 감회가 새로웠지만, 그냥 널따란 광장이라는 느낌만 들었다.
천안문 광장은 북경의 도시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광장의 남북길이가 880M, 동서의 넓이가 500M,면적이 44만 평방미터이다.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고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광장 안에는 100만명이 들어가 집회 및 행사를 수용 할 수 있고, 세계 도시중의 도심 가운데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 이다.
광장 북쪽에 천안문이 우뚝 솟아 있고 중앙은 인민영웅기념비, 기념비 남쪽은 모택동 주석 기념당과 정양문, 동서 양측은 중국역사 박물관과 인민대회당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지하도를 빠져나와 자금성으로 갔다.
자금성(紫禁城)은 북경에 있는 명(明). 청(淸) 시대의 궁전을 말한다.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그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1구획으로 둘레에 도랑을 파놓았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太和門)·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태화전은 남북 약 33m, 동서 60m의 당당한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중요한 의식장으로 사용되었다.
바깥부분, 즉 외조(外朝)의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서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 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으며, 그 좌경(左京)에 많은 건물이 있다. 내정은 1925년 이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중국 문화재의 전당이 되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때마침 북경올림픽 준비를 위해 전각들 곳곳을 비닐로 가려놓고 공사 중이라,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런 후에 스차하이후통 인력거를 타고, 후미진 골목을 누볐다.
인력거엔 두 사람을 태우고 앞에서 아저씨가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 하는데, 내가 무거운 까닭에 깡마른 아저씨가 더 힘들게만 보였다.
인력거를 타고 누비는 골목들은 우리의 6.70년대를 연상시킬 만큼 낡은 집들이 즐비하였으나,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예를 들면 피자집도 있었고, 낭만의 노천 카페와 술집들이 쭉 늘어져 있었다.
인력거를 타고 가면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더운 날씨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그런 다음 조금 시간이 남아 지하궁을 방문했다.
이 지하궁은 지하의 만리장성이라고도 불리우는 기나긴 터널이었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때 만든 것이라 했다. 지하궁 옆의 화장실에 들렀더니 변기 3개가 칸막이도 없이 나란히 놓여져 있는데, 너무 더러워서 비로소 중국에 온 실감이 났다.
저녁은 ‘전취덕’이란 유명한 북경 오리구이 집에서 먹었다.
음식들이 맛이 있었지만, 통후추와 향신료의 독특한 향으로 인해 입맛에 안 맞는 음식들도 있었다. 이 좋은 안주에 어찌 술이 빠질소냐--- 경주와 청도맥주를 마셨다.
숨가쁜 일정들을 소화 해내고 나서 , 드디어 숙소인 포시즌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의 숙소는 너무 근사했고, 조용한 정취를 자아내는 멋진 장소였다.
다들 짐을 풀고 나서, 본관까지 오픈 카를 타고 가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과일 안주-수박이 너무 맛없다.
이틀째 본관 호텔에서 조식후 8시 집합,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이동 10시 12분경 용경협에 도착했다. 용의 입속으로 걸어들어 가니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 신랑과 점탁씨는 힘들지 않은 오늘 일정이 너무나 좋다고 입을 모았다. 나 또한 너무 안심이 된다.
배를 타고 기암괴석들 사이를 유랑하였다.
기암괴석에 ‘용경협’이라고 빨간 글씨로 써놓았는데, 친절한 설명이 고맙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수려한 자연경관이 훼손 당한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점심엔 “해화성”이란 한식당에서 얼큰한 된장찌개와 돼지고기를 넣고 볶은 김치로 맛있게 밥을 먹었다. 집에선 잘 먹지도 않던 잡채도 맛있게 느껴졌다. 다들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조용하게 밥을 먹고 나니, 거의 그릇들이 휑하니 비워져 있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고 말았다.
한국을 떠난 지가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한식 한끼에 이렇게 감격스러운 기분이라니.....
그런 후 이화원에 들렀다. 이곳은 주위 8km. 인공호인 쿤밍호[昆明湖]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흙을 쌓아올려 만든 완서우산[萬壽山]이 북부에 있고 모든 건축물은 산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통칭 천간낭하(千間廊下)라고 불리는 장랑(長廊)이 눈길을 끈다. 12세기 금나라 때 지은 작은 궁전을 시초로 명조(明朝) 중엽에 만들어졌으며, 청조(淸朝)의 건륭제(乾隆帝)가 많은 전각(殿閣)을 세우고 정원을 꾸몄다. 서태후(西太后)가 살았던 별궁으로서 유명하다.
1860년 톈진[天津] 조약의 비준을 강요하는 영국·프랑스 연합군 8만이 베이징 서쪽 교외의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을 때 이곳도 화재를 입었다. 1894년 서태후는 환갑 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해군증강용으로 영국에서 차용한 돈까지 개축을 위해서 횡류(橫流)하였는데, 이것이 청 ·일전쟁(淸日戰爭)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베이징 최고의 관광명소로 호상에 떠 있는듯한 석주(石舟)와 석교(石橋), 해당화 ·난초 ·수양버들, 색채가 선명한 건축물과 장랑(長廊) 등이 경관의 조화를 이룬다. 199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홍교시장이란 짝퉁시장엘 들렀다.
1시간이란 시간 밖에 주어지질 않아 다들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남자들은 MP4를 단체로 구입했다. ( 9개 )
후일담에 의하면 제대로 작동되질 않아 모두들 애들에게 한 소리를 들었대나 어쨌다나.......
난 시어머님 드릴 것과 내가 쓸 진주목걸이 세트를 2개 샀다.
안 깎아 주려는 것을 거의 강탈하다시피 해서 200위엔에 구입하였다.
그리고 숨가쁘게 달려 서커스를 구경했다.
신기하고 현란한 재주에 경탄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저녁은 “동래순”이란 곳에서 샤브샤브를 먹었다.
다 먹고 잠깐 슈퍼에 간 가이드와 창훈씨를 기다리다 볼모처럼 잡혀 있는 바람에, 창훈씨 부부 약간의 실랑이----
창훈씨는 그 나름으로 최선을 다 하셨는데 알아주질 않아 서운해 하셨고, 선화씨는 우리 일행들을 배려하는 맘에 대표로 바가지를 긁다 일어난 트러블이라, 정말 미안하고 몸둘 바를 모를 만큼 참 어색하고 미안한 순간 이였다.
호텔 가든에서 술 파티 - 워낙 조용한 곳이라 다들 소리를 죽여 얘기 하자니 참 고역이었다.
목소리가 워낙 큰 우리 부부는 가끔씩 큰소리로 말하다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였다.
셋째날 역시 본관 호텔서 조식후, 차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차가 많이 막혀 1시간 정도가 지연되었다.
사마대 쪽의 만리장성-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에서 겁에 질려 초긴장 상태로 꼼짝도 못하는 내게, 민주아빠는 케이블 카를 흔들며 정신교육을 시켰다.
케이블 카에서 내려다 보니 산에 나무를 심어 놓고 그 주위에 석축을 쌓아 놓은 모습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도 더 걸어 올라가야 장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친 숨소리 숨가쁜 호흡 끝에 겨우 일행들과 합류성공, “성심씨”는 불편한 신발로 맨발로 올라가는 투혼을 발휘하였다.
장하다 방성심 손선아!!!!
휴게소 같은 곳에서 점심-현지식을 먹었는데 역시나 향신료 땜에 남긴 음식이 많았다.
고추장의 효력과 김을 조금씩 베어 먹으며 해결한 식사....
집에선 이리저리 굴러 다닐 김 한 장이 이렇게 소중한 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그리고 차를 타고 쌍탑산에 갔다.
여기서부터 중국인 가이드인 당위위- 작고 아담한 체구이지만, 너무나 귀엽고 야무진 아가씨-와 합류했다.
일행보다 조금 덜 올라가서 많이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뒤이어 황제들의 여름 별장인 피서산장에 들렀다.
이곳은 청나라 때 만들어진 행궁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아름다운 곳이고, 매년 한여름이면 중국 공산당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중요한 결정을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 우리에겐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주된 배경이 되는 열하로 알려져 더욱 친숙하고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기도 하다.
피서산장은 롼허강 유역 청더[承德]에 있는 청나라 때의 이궁인 러허싱궁[熱河行宮] 유적으로서 면적 564㎡에 이른다. 강희제(康熙帝)가 1702년 착공하였고 건륭제(乾隆帝)가 1790년 완공하였다.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규모의 궁궐 동산으로서, 강남지방 명승지를 본떠 수려한 자연경치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유적의 대부분이 산지이고 나머지가 평야와 호수인데, 총길이 약 10km에 이르는 궁궐 담장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궁전구(宮殿區)에는 단보징청뎬[澹泊敬誠殿]을 정전(政殿)으로 하는 정궁과 쑹허자이[松鶴齋]·완뤠쑹펑[萬叡松風]·동궁(東宮) 등의 건물이 있고 호수구에는 6개의 호수(창건 당시는 8개)가 있다.
호수 가운데에는 동해의 신선봉을 본뜬 3개의 섬을 쌓았으며 섬과 호숫가를 둑으로 연결해 놓았다. 섬 위에는 궁전이 있고 호반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동궁 북쪽 수문 위, 샤후[下湖]와 인후[銀湖]를 잇는 수로의 돌다리 위에는 3개의 정자가 있다. 1994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곳에선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연우루( 황제가 여자들과 비 감상 하던 곳), 경추봉 (하느님 손가락처럼 생긴 곳 ), 기우제 지내는 곳, 열하( 물이 얼지 않는 곳) 등을 보았고, 물레방아를 돌려서 그 물에 손을 씻으면 복을 가져 간다는 말에 모두들 열심히 손을 씻으며 즐거워 하였다.
저녁은 “금향향”이란 곳에서 석식을 먹구, 더불어 꼬치구이를 먹었다.
쇠심줄과 양고기, 닭갈비(계륵), 닭날개 구이를 먹었는데, 너무 짜서 먹기가 힘들었다.
그리고는 모두의 소원인 전신마사지를 받았다.
한 곳에 다 들어갈 수가 없어 두 곳으로 나뉘어 들어가야 했다.
중국 여자들이 마사지를 하면서 서로 수다를 얼마나 떠는지 귀가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중국어를 조금 배워서 아는 단어가 간간히 들리면 얼마나 반가운 마음이 드는지 .....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공부를 하는 건데, 후회막급 이였다.
내 생전에 언제 이렇게 호사를 누려 보려나.....
마사지를 받고나니 피곤함이 많이 풀렸고, 전신이 부드러워지고 촉촉해진 기분이라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넷째날 보령사에 들렀다.
세계 최대의 목조관음상인 구대신통완십행(具大神通完十行)이 안치되어 있어 대불사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보타종승지묘와 함께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고, 1755년에 건축을 시작해 약 4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보령사의 본전은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중국식으로 건축된 사원으로 이름을 나타내는 현판 아래에 ‘금륜법계(金輪法界)’라고 쓰인 더 큰 현판이 걸려 있다.
본전 안에는 현재 과거 미래의 부처가 다 있었다.
그 들어가는 입구에는 장경통이 있어 시계방향으로 돌리면서 번뇌를 다 잊고 가라고 한다.
민주아빠는 향을 피우며 소원을 간절히 빈다.
그리고 소포탈라궁(PUTUO Zong Cheng Temple)-푸닝사:북방라마교 사원엘 들렀는데, 티벳사원을 본떠 만든 것이라 했다.
유리탑문이 있는데 가운데 통로는 왕과 그 어머니 통과하였고, 서쪽은 무관이 드나 들었고 거기를 지나면 부자가 되고, 동쪽은 문관이 지나가고 높은벼슬을 얻을 수 있단다.
라마교 사원에 들어가서 라마계단을 올라갈 때는 뒤돌아 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고 했다.
그 계단은 바깥에 52개+안쪽 52+ 생로병사 4개=108계단이라 하였다.
라마교의 전통처럼 깃발을 날리게 하며 소원을 비는데, 국기 게양식처럼 올리는 대홍대(大紅臺)을 보았다.
또 19m 108부처님 동상이 자단나무로 조각되어 있었다.
기와장은 도금이 되어 있는데 일본이 침공했을 때 그 금을 다 긁어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그 기와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금을 가져간다는 의미가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혼잡스러워 사람구경은 참 원없이 하였다.
티벳은 바람이 세어서 맹창으로 햇빛과 바람만 보고 봉폐되어 있었다.
봉폐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되어 있다.
점심은 창회헌(暢懷軒: Chang Huan Xuan)에서 먹었다.
승덕은 380만 인구이고 북경에서 260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북경보다 아파트 가격이 훨씬 저렴하고 신시가와 구시가가 확연히 구분되는 낙후된 지역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레미콘 시설물들도 너무 조악해 보였다.
점심을 먹고 잠시 쇼핑을 하는 중에 점탁씨의 루이 실험 시도- 몇 번 두드리다 그냥 힘없이 깨어지는 바람에 비싼 수업료 톡톡히 치루고(8만 5천원 배상) 그대신 작은 옥 루이를 얻었다.
조창완님의 댓글
조창완 작성일즐거운 여행 하셨다니 감사합니다. 다음 번에 기회가 되면 더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0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