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을 거닐며..(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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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순택 댓글 0건 조회 1,487회 작성일 04-08-07 00:50본문
2001년 6월 자금성을 찾는 날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위 신무문(神武門) 오른쪽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뒤,
노오란 우산도 사 쓴 채, 자금성을 남쪽 천안문이 아닌
북쪽 신무문을 통해 들어가 거닐었습니다.
자금성의 북쪽문인 이 神武門은 1420년에 세워졌으며
출입구 3개에 높이 31m. 문루 안에는 종과 북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과 저녁 무렵이면 종을 울리고 북을 쳐서 동이 트고,
해가 지는 것을 알렸었다고 합니다.
이 神武門은 明나라의 숭정제가 1644년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의 외성을 점령하고 포위를 좁혀오자 죽음을 각오하고
황태자들을 평민처럼 변장시켜 피신시켰으며
곤녕궁에서는 황후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울부짖으며 칼로 두 공주를 벤 후,
자금성에 남아 있는 관리,환관,경비병들을 소집했으나
신하들은 한명도 오지 않았고 다만 환관 왕승은 만이 따랐는데
이때 숭정제의 왼발은 맨발이었답니다.
崇禎帝는 경산(景山)을 조금 올라가 유서를 쓸 종이도 없어
자신의 옷자락에 유언을 남긴 후, 홰나무에 목을 달았는데
그때가 1644년 3월 19일.. 숭정 17년으로 그의 나이 34세였다고 합니다.
이 景山의 당시 이름은 만수산(萬壽山)이었으며
목을 맨 홰나무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잘려 나갔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81년에 새로 심은 것.
명나라 마지막 숭정제가 한쪽 발에 신도 못신고
이 신무문을 지나 경산으로 올라 자결했던 것입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는 11대 광서제가 후사없이 죽자,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큰 아들이었기에 1909년 3살때 즉위하여
淸나라 12대 宣統帝가 되었으나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황제의 자리에 3번 즉위하고 3번 퇴위한 뒤, 수용소 감옥을 전전하다가
식물원 정원사로 생을 마감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습니다.
明의 숭정제나 淸의 선통제 모두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비참한 생을 마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가 찾은 북경의 한가운데
자금성(紫禁城)은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위 신무문(神武門) 오른쪽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뒤,
노오란 우산도 사 쓴 채, 자금성을 남쪽 천안문이 아닌
북쪽 신무문을 통해 들어가 거닐었습니다.
자금성의 북쪽문인 이 神武門은 1420년에 세워졌으며
출입구 3개에 높이 31m. 문루 안에는 종과 북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과 저녁 무렵이면 종을 울리고 북을 쳐서 동이 트고,
해가 지는 것을 알렸었다고 합니다.
이 神武門은 明나라의 숭정제가 1644년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의 외성을 점령하고 포위를 좁혀오자 죽음을 각오하고
황태자들을 평민처럼 변장시켜 피신시켰으며
곤녕궁에서는 황후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울부짖으며 칼로 두 공주를 벤 후,
자금성에 남아 있는 관리,환관,경비병들을 소집했으나
신하들은 한명도 오지 않았고 다만 환관 왕승은 만이 따랐는데
이때 숭정제의 왼발은 맨발이었답니다.
崇禎帝는 경산(景山)을 조금 올라가 유서를 쓸 종이도 없어
자신의 옷자락에 유언을 남긴 후, 홰나무에 목을 달았는데
그때가 1644년 3월 19일.. 숭정 17년으로 그의 나이 34세였다고 합니다.
이 景山의 당시 이름은 만수산(萬壽山)이었으며
목을 맨 홰나무는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잘려 나갔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81년에 새로 심은 것.
명나라 마지막 숭정제가 한쪽 발에 신도 못신고
이 신무문을 지나 경산으로 올라 자결했던 것입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는 11대 광서제가 후사없이 죽자,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큰 아들이었기에 1909년 3살때 즉위하여
淸나라 12대 宣統帝가 되었으나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황제의 자리에 3번 즉위하고 3번 퇴위한 뒤, 수용소 감옥을 전전하다가
식물원 정원사로 생을 마감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습니다.
明의 숭정제나 淸의 선통제 모두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비참한 생을 마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가 찾은 북경의 한가운데
자금성(紫禁城)은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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