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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맨을 위한 중국견문록] 중국 진출 교두보 동북 조선족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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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창완 댓글 0건 조회 2,989회 작성일 05-07-1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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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견문록]중국 진출 교두보 동북 조선족 사회기사 번호:55048

조창완(jochangwan69.hanmail.net)b_another.gif 2005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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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교육수준˙사회적 기반 형성˙˙˙컴뮤니티 해체˙부정적 이미지가 걸림돌


올 들어 네 번째 동북을 찾는다. 그간 여행단의 인솔을 위해서도 찾았고, 항일 무장 독립운동사를 방송 프로그램으로 제작하기 위한 발걸음도 있었고, 또 고구려나 발해 유적 답사를 위해서 찾기도 했다. 내일이면 또 여행단을 인솔해 동북에서 일주일간 헤맬 것이다. 그 길에서 필자는 항상 조선족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선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한 가지 이야기를 던져야 할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족들을 ‘조선족 동포’라고 부르는 문화가 생겼다.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호칭인데, 이에 대해 조선족들은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이나 일본의 동포들은 ‘교포’라고 부르면서 조선족은 왜 동포로 부르냐며 자신들을‘교포’라고 불러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동포이든 교포이든 특별한 구별은 없을 테니 개인적으로는 조선족들이 원하는 대로 교포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리영희 선생이 ‘북괴’를 ‘북한’(사실 ‘조선’으로 부르는 게 정확하다)으로 부르자고 주창했던 것보다는 휠씬 쉬운 일이니, 이제 조선족들을 ‘조선족 교포’로 부르는 문화를 가져보는 게 어떨까. 
개인적으로 조선족 교포들과 간접적인 인연을 갖고 있다. 1999년 중국에 건너와 현지 신문을 책임지고 만들기 시작한 2000년 3월, 조선족들을 사냥하듯 마구 흠잡는 국내 언론들을 향해 ‘냄비근성’이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덕분에 중국 현지 특파원들에게 항의전화도 많이 받았지만, 사건의 전후 관계는 따져보지 않은 채 조선족을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언론의 잘못을 꼬집으려는 게 의도였다. 사실 지금 조선족 사회는 상당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랴오닝, 지린, 헤이롱장 성 등에 있는 조선족 학교들이 속속 문을 닫고 있다는 사실이나, 부모들이 돈벌이 나가 조부모님에게 맡겨진 뒤 비뚤어져 가는 아이들의 현실이야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겠다. 

 무장투쟁 얼 서린 곳


이 과정에서 우리 교포들이 경작하던 땅은 대부분 한족 등 다른 민족의 손으로 넘어갔다. 사실 조선족의 농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국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과거 한족들은 더운 날씨를 만나기 힘든 동북에서 벼농사를 짓지 못했다. 그런데 차츰 동북에 정착한 우리 민족은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 무단장(牡丹江)시 인근의 아오동(敖東) 등의 쌀은 중국 쌀 가운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아오동의 쌀뿐만 아니라 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짓던 벼농사는 동북을 생존하도록 한 바탕이었다.  

사실 최근 동북을 돌아다니면서 필자는 새삼, 동북에 대해서 참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동북을 돌아다니면 사실 곳곳에서 항일무장 투쟁 당시의 옛 흔적을 볼 수 있다. 한국과 꼭 닮은 구릉과 산의 연속인 이곳에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일본군이나 경찰을 상대로 맞섰다. 박명림 교수가 지적했듯이 러시아가 독일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의 행보를 막아 극동에서 힘의 소모를 줄임으로써 서부에서 승리해 이룰 수 있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동북 항일무장 투쟁은 중국 남부에서 활동했던 임시정부의 노력이나 미국 등지에서 벌인 외교적 성과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이후 벌어진 상황을 생각하면 그들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했을지 뻔하다. 더욱이 문화대혁명 당시 조선족 사회는 홍위병들의 최대 탄압 대상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사실 92년 국교 정상화를 전후로 이루어진 한국 기업이나 한국인의 중국 진출도 조선족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휠씬 속도가 더디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물론 상호간에 사기를 치는 등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교포의 존재는 한국 기업이나 한국인이 중국 현지에 빨리 자리를 잡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지금도 그런 기능을 하고 있다. 

조선족 사회가 이미 그 자체로도 적지 않은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베이징이나 톈진은 물론이고 동북에서 조선족들의 위상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중국 각 민족 가운데 최고의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은 각 분야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 조선족 사회는 거대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기도 하다. 우선 2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중국 각지에 분산되면서 그들의 커뮤니티는 차츰 사라지고 있다. 몇몇 대도시에 교포 학교가 생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조선족 자녀들은 한족 학교에 다니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중국말을 완벽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이유와 더불어, 한족 중심의 사회에서 필요한 ‘관계’를 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현실 논리가 작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인 옌지(延吉)는 확실히 한국이라는 존재로 인해 급속한 발전을 거듭해 동북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실제로 옌지시 예산에 버금가는 돈이 한국을 통해서 들어온다는 말이 교포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 또 여전히 한국에 가서 새로운 생활 기반을 만들어보고 싶은 교포들이 여전히 많은 게 현실이다. 


국적 보유했지만, 한 뿌리 의식 강하게 남아


필자 역시 현지 회사에서 교포들과 함께 일을 한다. 이들 가운데는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몇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하나는 그들이 중국 국적을 갖고 있는 중국인이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 뿌리라는 의식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포들을 보면서 놀라는 것 중의 하나는 어쩌면 그렇게 험한 환경에서도 조선족 교포를 찾아 결혼하고 조선족 커뮤니티를 유지하려는 본성을 잃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제 여름이 오고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보기 위해 동북으로 향할 것이다. 어떤 대상이든 그것을 부정적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교포들을 보는 시각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눈앞에 있는 막을 걷어내고 살펴보면, 그들은 전혀 새로운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중국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조선족 교포와 연결하지 않고 벌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조선족 교포를 접할 때 예전에 가졌던 느낌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선입견과 편견을 얼마만큼 떨쳐내고 그들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가가 중국 사업의 성패를 가눌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e.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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