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으로 보는 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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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창완 댓글 0건 조회 2,272회 작성일 07-03-18 22:15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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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돌아다니는 것이 일이라 만리장성도 벌써 수차례 갔다왔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중에 하나인 라오롱토우(老龍頭)에서 새해를 맞아보기도 했고, 명대에 왜구를 물리친 명장이자 중국 무술의 비조(鼻祖)중에 하나인 척계광(戚繼光)의 흔적이 살아있는 황야관(黃崖關)의 언덕을 헤매기도 했고, 날씨가 어떨까 마음 졸이며 어머니나 친구를 동행해 빠다링(八達嶺)으로 가기도 했다. 또 장성 모습을 담기 위해 쓰마타이(司馬臺)나 구베이코우(古北口) 등은 물론이고 멀리 산시(山西)나 샨시(陝西) 등에서 무너져 가는 장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런 장성과의 만남 속에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장성만큼 모순이 많은 곳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장성을 만든 목적은 북방의 유목민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었지만 장성의 축조는 무리한 토목공사의 전형으로 오히려 왕조의 몰락을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 또 과거에 폭악 정치의 상징인 진시황이 정치적으로 부활하면서 만리장성도 더불어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게 됐다. 또 때문에 봉건문화의 상징이 되어 문화대혁명 당시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복권되는 한편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쳐서 지금은 중국 여행산업의 선봉에 서 있는 곳이 만리장성이기도 하다. 사실 나와 동행했던 이들은 만리장성에 가서 그다지 큰 감흥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리장성에 가서 많이 보면 40리 장성을 보고 적게 보면 한두리 장성 밖에 못보는데, 만리장성의 감흥이 생겨날리 만무하다. 또 거대한 성벽이 주는 감흥도 크지 않다. 장성의 넓이로 가장 큰 베이징 인근 빠다링의 경우 아래쪽 넓이가 8~9미터로 데이빗 커퍼필드가 마술로 통과하는 척하는 이벤트도 벌리는 곳이지만 이 역시 큰 감흥을 받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만리장성을 중국 역사를 읽은 하나의 흥미로운 키워드로 보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만리장성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위치를 고정할 수는 없지만 북방민족과 한족의 권력경합 정점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결국 강력한 북방 유목민족과 남쪽의 한족간의 권력 쟁탈이 중국 역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만리장성은 그 역사를 지켜본 최대의 목격자가 되는 셈이다. -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한무제는 2만리장성으로
장성은 BC 7세기 주(周)나라가 멸하고 생긴 춘추시대에 그 역사가 시작된다. 춘추시대는 제(齊), 진(晋), 진(秦), 송(宋), 초(楚) 나라가 가장 강성한 5패(覇)를 이루었다. 이들 5패는 각 국가간에 경계를 이루고, 북쪽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하나둘씩 성을 쌓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제나라 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룬 관중(管仲)의 기록인 관자(管子)에 처음 ‘장성’(長城)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하지만 산둥반도에 중심세력을 둔 제나라의 북쪽 경계는 지금의 장성보다 휠씬 아래다. 지금의 장성의 위치에 한층 가까운 곳은 연(燕)나라의 장성이다. 진시황에게 자각 형가를 보냈다가 실패해 멸방의 시기를 당긴 태자 단(丹)이 왕위에 오르기도 한 연나라라는 지금의 베이징(그래서 청나라때까지만 해도 燕京이라 불렀다)을 중심으로 자리잡아 지금의 만리장성과 유사한 위치해 있다.
진의 멸망이후 만리장성은 사실상 거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시황제에 버금가는 통치자 한무제(漢武帝 재위 BC 141~87)가 등극한다. 그는 54년에 이르는 재위기간도 재위기간이지만 동중서(董仲舒)등을 채용하여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동서로 영토를 넓혔다. 또 그는 그 힘을 활용해 흉노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한편 이번에는 깐수성 민현에서 멈추지 않고, 신장성(新疆省)에 이르는 2 만리장성을 구축했다. 이후에 정비됐던 어느 장성보다도 거대했다. - 유목민족과 한족 권력 교차하며, 기능 축소되어가 한무제가 만리장성이 아닌 2만리장성을 쌓았어도 내부의 분열은 어쩔 수 없었다. 한나라는 후한을 거쳐서 ‘황건적’의 난등으로 급속한 위기를 맞는다. ‘삼국지연의’의 배경이 되는 위촉오 삼국이 번성한 시기다. 창지앙 중심지대에서 이 세나라가 싸우다가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사마중달이 세운 진(陳)을 멸망시키는 시기를 일컫는 남북조시대(221∼589)에 북쪽에는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 동위,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이 있었다. 인산산맥과 타이싱산 남쪽에 있는 이 국가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돌궐(突厥), 유연(柔然) 등 북방 유목민족이었고, 역시 강성한 이들 민족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남북조시대는 수(隋)의 통일(589년)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수 역시 돌궐이나 거란 등을 막기 위해 장성의 보수작업에 나섰다. 태종의 힘으로 한무제 못지 않은 국력의 번성을 맛본 당(唐 618~907) 역시 흉노족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했다. 송(宋 960~1277) 왕조에는 봉화대나 무기고 등을 보강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여진족이 건립한 금(金 1115∼1234)은 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장성 보수를 나섰다. 하지만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까지 세력권을 넓힌 칭기즈칸에게 만리장성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고에 의한 중원의 통일은 만리장성 남북간의 완전한 통일을 말했다. 원(元 1271∼1368)나에게 만리장성은 상호가 왕래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원이 멸하고 등장한 한족지배의 국가인 명(明 1368∼1644)나라는 다시 한번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교훈을 상기하며 대대적인 만리장성의 보수작업에 들어간다. 베이징 인근에 있는 빠다링을 비롯해, 스마타이, 황야관, 산하이관 등 주요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때 세워지거나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친 장성들이다. 명나라는 동쪽에서는 압록강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지아위관(嘉?關)까지 13000리에 달하는 장성을 건설했다. 하지만 거대한 보수공사를 마친 만리장성 역시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명 역시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청(淸 1636∼1912)에게 멸망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위정자들은 앞선 역사를 타산지석 삼았다. 청나라는 성을 쌓아 권위를 지키지 보다는 정복 및 교화사업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는데 치중했고, 왕들은 자금성(紫禁城)이 있었지만 천하를 순행하면서 정치를 편 경우가 많았다. 사실상 만리장성의 기능은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넘어오는 시점부터 끝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관광자원으로의 만리장성은 눈에 띄는 몇 곳만이 필요할 뿐 전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명나라 13000리의 장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1/3은 이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고, 1/3은 시간 앞에 명운을 맡겨 놓고 있다. 단지 1/3만이 보호되면서 여행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 장성도 민초의 원망과 눈물앞에서 무너진다
당시에 장성 1리를 쌓는데, 한사람의 산채로 매장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자, 시황제는 여지없이 이 지시를 실행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소주(蘇州)에 만희량(萬喜良 역사에서는 범기량(范杞良)으로 나온다)이 사는데, 그 사람 한 명이면 만 명의 목숨과 같네”라는 동요가 퍼져갔다. 이 동요를 들은 선량한 선비 만희량은 피신을 떠났는데, 송강부(松江府)에서 관리를 피해 어느 집에 들어갔다가 자신을 보고 놀라 물에 빠진 맹강녀를 구해준다. 맹흥이 키웠는데 강씨 할머니의 집에 넘어가 자란 호박에서 나왔다고 해서 맹강녀라 불린 이 여인과 만희량은 혼인을 한다. 하지만 금방 소문이 퍼져 만희량은 잡혀가고, 반년이 되도 돌아오지 않자, 맹강녀는 온갖 고초를 견디면서 남편이 노역하고 있다는 장성터로 간다. 하지만 그녀가 들은 말은 “이미 죽어 장성에 묻힌 자가 1만이 넘어 죽일 필요가 없어서 죽이지는 않고, 일했으나 몸이 약해 잘 먹지 못하다가 죽어, 장성 밑에 묻어버렸소이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녀는 남편뿐만 아니라 천지간에 셀 수 없이 많은 과부와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그리며 살아갈 거라는 슬픔에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후에 40리의 장성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백골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피가 스며드는 것을 보고 남편의 뼈를 찾았는데, 마침 순행중이던 진시황이 이 사태를 듣고 달려왔다가 맹강녀를 본다. 시황제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 황후로 삼으려 할 때, 그를 꾸짖다가 생각을 바꿔 압록강에 긴 다리를 만들어주고, 분묘를 만들어달라, 남편의 무덤에 절을 해라 등 세가지 소원을 말하자 그녀의 미모에 반한 시황제는 들어준다. 압록강 다리가 완성되는 날, 그녀는 강가로 뛰어가 시황제에게 외친다. “네가 장성을 쌓는 것은 오랑캐를 막아 너의 나라를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라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냐? 나 때문에 장성의 땅 속에 묻힌 그 영혼들은 막지 못할 것을. 그들의 원망이 산 사람들의 원한과 결합된다면 조그만 힘도 들이지 않고 너의 그 나라를 빼앗아 갈 수 있을 것을”이라고 외친 후 치마를 뒤집어쓰고 강물에 뛰어 들어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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