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운남 여행기6(마지막회)-메이리쉐산 가는 길] 설산과의 긴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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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창완 댓글 0건 조회 6,708회 작성일 07-03-18 22:2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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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아래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은 티베트와 경계에 있는 메이리쉐산(梅里雪山)이다. 그래서 비교적 긴 시간을 할애한 운남 여행자들의 마지막 여행지는 메이리쉐산이 되기 쉽다. 우리도 그랬다. 사실 이곳의 여행자는 어디선가 봤던 오체투지로 라싸를 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제 중국 본토의 색채를 띠는 샹그릴라만 해도 장족 문화의 느낌을 많이 느끼기 어렵다. 한족화 정책과 더불어 대중 소비문명은 그들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분명히 어느 골짜기에서 라싸로 향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들을 보지도 못했고, 또 그것을 봤다고 해도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다. 장족 어머니와 한족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소박한 버스 기사 짜오스푸(趙師傅)가 버스 앞에 걸어두었다가 메이리쉐산이 보이는 신단에 걸어두는 작은 수건이 그들에게서 느끼는 신의 모습이다. 신이 모든 것이었던 그들을 이제 돈이 변화시키고 있다. 강물도 거슬러간 역사의 노도 샹그릴라에서 메이리쉐산으로 가는 길은 계속되는 천길 낭떠러지와 아름다운 고원 초원의 연속이다. 거기에 왼쪽에는 만년 설산들이 늘어서 있어 신비한 느낌을 준다. 중국에서 티베트를 향하는 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하지만 그런 대협곡을 8시간 정도 달려야 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는 길 중간 중간에 여행자들에게 안식을 주는 곳들이 있다.
원 이름은 쓰촨 두지앙위앤(都江堰)에 있는 푸롱치아오처럼 거센 강물이 이곳에서 평안을 찾기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허롱이 이끄는 홍군의 노도(怒濤)는 이 진사지앙도 거꾸로 올라갔다. 이들은 이곳을 지나 쓰촨, 깐수, 닝샤, 샨시 등지를 거쳐서 최후 옌안(延安)까지의 대장정을 진행했다. 허롱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인물의 개인사는 주더(朱德)과 닮았고, 정치적 처지는 펑더화이(彭德懷)와도 닮았다. 그는 중국 공산당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인 난창(南昌) 봉기를 일으킨 주역 가운데 하나다. 1928년 8월 1일(이날이 중국 창군일이 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 허롱 등이 주축이 된 이 사건으로 한낱 비적에 지나지 않았던 홍군은 서서히 군대의 면모를 갖추게 됐기 때문이다. 일자무식의 농민군에서 중국 10대 원수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성장했지만 문화대혁명기에는 린비아오(林彪)의 정적이 되는 바람에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 됐다. 이곳을 지나는 창지앙(長江)의 상류 진사지앙과 베트남 하노이를 지나 통킹만으로 향하는 난창지앙, 나중에 메콩강의 원류가 되는 누지앙(怒江) 등은 각각 20~30km 거리를 두고 나란히 흘러간다. 이름하여 싼지앙빙류(三江幷流). 모두 누런 황토빛이다. 티베트에서 온 만큼 아직 오염되기 직전의 강들은 거대한 협곡을 타고, 유유히 흘러간다. 둥즈린스, 여전히 삶인 종교 강을 건너 조금 더 달려가면 뻔즈란에 닿는다. 이곳은 과거 동주린스(東竹林寺)의 사하촌이다. 진사지앙 강가에 위치한 이 마을에 두 번이나 들렀는데, 그다지 바가지도 없고 사람들도 순박하다. 샹그릴라에서 메이리쉐산으로 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해야 하는 위치다. 다만 식사를 하기에 애매한 시간대에 항상 이곳에 닿는다. 이 마을을 지나 버스는 다시 힘겹게 산을 오른다. 산을 오르다가 고개에 못 미쳐서 차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면 위에량완(月亮灣)에 닿는다. 샹그릴라 대협곡의 입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누런 진사지앙의 물줄기가 에둘러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곳은 원래 가지파(噶擧派)의 사원이었는데 종교전쟁에서 거루파가 승리함으로써 양측에는 석가모니나 관세음, 문수보살, 도모(度母), 보현보살 등이 있어 확실한 라마교 사원임을 말해준다. 이곳 역시 문혁 때 불탔다가 1985년에 중건된 운명을 거쳤다. 처음 들렀을 때 적막함과 달리 두 번째 들렀을 때는 마당에 어지럽게 신발이 널려 있었다. 안에서는 수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법당의 내부는 수련 중에 버린 갖가지 쓰레기로 어지럽다. 마침 공양시간이어서 배급자들이 통 가득히 먹거리를 가지고 들어간다. 이곳 운남 북부의 장족 아이들은 나이가 차서 출가하면 이곳에서 생활했다. 족히 500명은 넘어 보이는 아이들이 여전히 전통의 생활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곳 젊은이들에게 사찰 생활은 생존 방식 가운데 하나였을지 모른다. 생존환경이 극히 열악한 이곳에서 아이들을 모으고, 최소한 공중위생을 담보할 수 있는 이곳이 없었으면 남자아이들의 생존율은 더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종교가 삶이다. 슬픈 운명을 지닌 백마들의 수난 동주린스를 지나면 버스가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오른다. 이 지역이 바이마쉐산(白馬雪山 일명 白茫雪山) 지역이 시작된다. 길 바로 옆에는 잡힐 듯한 만년설산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아름다웠을 백마들은 이제 지구 온난화로 인해 갈수록 그 아름다운 털빛을 잃고 있다. 전에 만년설이 있었던 곳은 이제 주토(朱土)와 흑빛의 바위로 맨 얼굴을 드러낸 곳이 많다. 차는 4296m 높이에 설산 입구에서 선다. 뎬장(운남과 서장)공로 운남 구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라싸가 3700m 정도니, 그곳보다 훨씬 높은 지점이다.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약간의 두통 등 고산병을 느낄 수 있는 곳. 하지만 산을 넘어온 청량한 바람에 기운을 차리고 잠시 둘러본다. 혹시나 싶어서 고산병 예방약인 훙징톈(紅景天)을 먹게 해선지 모두 건강한 모습이다. 고개를 넘어 더친으로 향하는 길이 시작된다.
이곳은 워낙에 고산이어서 평지보다 약간 늦게 진달래가 피는데 그때가 5월 말에서 6월 초다. 기자 역시 이곳 진달래 피는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 드넓은 군락이 그 모습을 예시해 주고 있었다. 내년에는 이벤트를 만들어서라도 꼭 들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다시 한 시간 정도 낭떠러지 길을 달리면 더친에 닿는다. 더친의 입구에는 손님을 맞는 잉빙타이(迎賓臺)가 있다. 백탑들 사이로 성산인 메이리쉐산의 모습이 보인다. 사방에는 이곳을 지나면서 걸어놓은 기원을 담은 작은 수건들로 가득 차 있다. 해발 6740m 카와커보봉을 비롯해 6000m가 넘는 봉우리 13개가 다정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다. 일명 태자13봉(太子十三峰)이다. 카와커보봉은 티벳 8대 신산으로 설산의 신(雪山之神)으로 불린다. 끝없는 빙하로 이어진 이 길은 등산인들에게 유혹이었다. 하지만 설산의 신은 그 자존심에 맞게 아무에게도 그 영광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1991년에는 중국과 일본 연합 등산대가 등반을 시도하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대설로 철수하는 중에 17명 등산대원 전체가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샹그릴라, 극한의 삶이 만든 조화
이곳이 도시로 성장한 것은 8세기 차마고도(茶馬古道)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운남의 차나 특산물은 이 험한 길을 거쳐서 당시 강성했던 티베트로 이동했다. 샹그릴라나 더친 등은 그런 역참 역할을 했고, 인근에 거주하는 이들의 물물 교역 시장 역할을 해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도로 옆에는 재래시장이 있어서 여전히 그런 도시로서의 기능을 말해준다. 여행자들은 이 더친의 모습에서 샹그릴라를 읽어내고 있었다. 그들이 환상 속에서 이곳을 생각했나 보다. 극한의 삶이 만든 도시가 샹그릴라였다니. 더친에서 30분쯤 더 가면 페이라이스(飛來寺)가 있다. 같이 동행했던 한 분이 절이 난을 피해서 통째로 움직인 비래의 전설을 말씀해 주신다. 어디서 날라온 절인지 모르나 이 절이 세계 배낭여행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메이리쉐산의 일출과 일몰을 보는 최고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페이라이스에서 조금 더 간 곳이 보기 좋은 데 이 절로 인해 이 지역은 페이라이스로 불린다. 절 안에는 의외로 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법당의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절을 관리하는 이들이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자체가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닐텐데, 그들은 중국 여행자들도 수없이 다니는 이곳에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모시고 있다. 여행 중에 몇 분이 장족 사람들에게 현 달라이 라마에 관해서 묻는 바람에 좀 긴장을 한 적이 있는데, 그들의 사진까지 모신다는 점에서 너무 의외다.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나름대로 포용적인 것인지 아니면 감독이 불가능해서 그런지는 모를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라의 성쇠를 타고 고난받는 종교인이나 정치인들이 좀더 자유롭게 되었으면 하는 작은 기도뿐이다. 여행자의 종착지 메이리쉐산
기자는 두 번이나 들렀지만 가끔 한두 태자의 고고한 자태를 보았을 뿐 전경을 볼 기회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허허함을 달래려고 하늘의 별이나 보면서 술을 마시는 게 내 역할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멀게 느껴지는 카와커보봉도 여행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지척까지 갈 수 있다. 바로 밍융(明永) 빙천(氷川)이 있기 때문이다. 일출을 보는 페이라이스와 메이리쉐산 사이에는 가운데 난창지앙(欄滄江)이 흘러가는 거대한 협곡이 있다. 때문에 한 눈에 설산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빼어난 경관이 탄생했다. 낙차가 2000m에 달하는 계곡을 내려가면 난창지앙이 있고, 다리를 건너서 조금 더 가면 설산에서 나온 얼음들이 강을 이루는 빙천을 볼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밍융마을이다.
문제는 그 호스 트래킹 가격을 협상하는 것이었다. 마부들의 대장이 부르는 가격은 왕복 85위안(1위안은 약 150원), 오르는 편도는 70위안, 내려오는 것은 15위안이었다. 문제는 중간에 합류한 한 여행자가 왕복 60위안까지 깎을 수 있다는 정보를 제시하면서다. 진행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깎지 못하면 좀 이상한 처지가 됐다. 결국 한푼도 못 깎는다는 그들과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우리 일행은 걸어 올라가는 무리를 감행했다. 다행히 걷는 것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힘들어했다. 이런 협상의 어려움은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단 5위안이라도 깎을 수 있을 거라는 내 협상은 다시 여지없이 무너졌다. 걸어가겠다는 우리 앞에 그들은 자신감있게 걸어갈테면 걸어가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시간도 늦는 바람에 정가로 말을 탔다.
여지없이 상업의 논리가 이곳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왠지 쓸쓸하다. 이제 마부업계의 환갑인 50살의 펑 아저씨는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는 두 아들의 운명에 조금은 비감해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무겁고 육중한 몸을 태우고 언덕을 오르는 말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왔다. 사원인 타이즈먀오(太子廟) 앞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신기한 만년설의 빙천이 눈앞에 펼쳐진다. 갈수록 좁아져 가는 것이 눈에 띄는 빙천과 그 뒤로 펼쳐진 카와커보봉은 신성한 느낌 그 자체다. 빙천의 모습이 마치 한반도 지도를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아서 너무 흥미롭다. 이게 무슨 징조일지 싶어서 걱정 반 기대 반이다.
하지만 이제 카와커보봉은 다른 설산의 운명들처럼 그 몸체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설산의 운명이 우리 인류의 미래 운명이기에 조금 더 비감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설산은 아니지만 이런 거대한 자연에 빗대어 인류의 미래를 예감했다. 그 대부분의 결말들이 암담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가슴이 저린다. 이제 빙천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돌아가는 차에 오른다. 피곤한 기사가 걱정되어 기사 옆 좌석에 앉는다. 길 옆으로 천길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설산과 인류의 종착점은 어딜까. 그곳이 멀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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