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소수민족인 '치앙주(강족)'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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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준화 댓글 2건 조회 4,141회 작성일 04-11-02 10:42본문
강족은 중국민족중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중의 하나로 현재 사천성 아바 장강자치주내의 자치 민족 중 하나로 주로 모현과 문천, 이현, 송판등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1964년 전국 제 일차 인구조사시, 자치주안에 살고 있는 강족은 48261명이어 주안의 총인구의 9.98%를 차지하였다.
서중서는 <강족사>에서 강족을 언급하여 말하길 "강족은 고대 서쪽에 사는 유목민으로써 중국서부 각지에 분포하여 있었다. 그들은 본래 농목을 겸하는 부락이었다"라고 하였고 강족은 주로 양을 길렀으며 강족의 羌자도 羊과 人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삼천여년전의 갑골문의 기록에서도 밝히길 은상시기 이미 강족이 역사의 무대 위에 존재 했었고 십분 활약했었다고 한다.
당시 노예제의 은왕조는 강족을 노예로 부렸지만 강족의 수령만은 관리로 임명하였다. 기원전 1818년에 주나라 무왕은 강족을 포함한 주변 부족과 군사연맹을 맺어 폭악한 은나라 왕조를 몰아냈습니다. 은상시기에는 강족은 서북과 중원지역에서 활동하였고 기원전 오세기 중엽 강족은 진나라 사람들과 빈번히 왕래하고 서로 영향을 주어 함께 산림개발이나 생산발전을 위하여 협력하였으며 사세기 말엽에는 일부분 강족들이 서남과 서북으로 이주를 시작하였으며 민강상류, 청장고원으로 이주하기도함.
기원전 206년 한대 봉건왕조가 강성해지고 한 무제 시기에 서북에 거주하던 많은 수의 강족 이 내륙으로 이주를 하여 한족과 함께 생활하고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날로 증가하였으며 사유제도도 얼마간의 발전이 있어 점점 봉건제의 굴레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 무제 시기부터 강족은 대량의 내륙에 거주하고 이후 점점 현지 한족에 의해 동화과정을 겪는다. 이후 수당시기 민강 상류 일대의 강족은 한족과 야루캉부강 유역의 투루족 지역중간에 위치하여 한족과 투루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중원의 소금, 차, 천, 생산공구와 변방의 말, 약재, 가죽 등의 상호교역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당왕조에 들어서는 상당부분이 당나라에 편입이 되거나 혹은 투루정권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현재의 민강상류의 강족들은 <사천 고대사>에 써있길 진한과 그 이후 시기에 이주해 온 강족과 현지 원주민이 합쳐져 지금의 강족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대이후 서북부의 강족은 두차례의 비교적 큰 이주를 거쳐 민강상류 지역으로 이주해 왔으며 첫 번째는 위진남북조시기, 또 한차례는 수당시기로써 이주 당시 이미 민강상류에는 강족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당시기는 투루왕조가 동쪽으로 확장이 되자 하황일대의 강족들은 또다시 내륙으로 이주를 시작하여 그중 일부분은 민강 상류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역사는 강족들 사이에 전해오는 전설로써도 알 수 있는데, 아주 오랫 옛날 강족은 한번의 큰 이동이 있었다. 그중 한 부류가 민강상류로 이동하여 왔다. 여기서 그들은 낯설은 종족과 부딛치게 되었는데, 그들은 힘이 세고 덩치가 컸다고 한다. 강족은 그들과 전쟁을 하였고 계속적인 패배를 거듭한 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하려 하던 차에 다행히 꿈에서 신의 계시를 얻어 단단한 백운석과 나무막대기로 무기를 만들어서 손잡이에 양털로 표지를 세기고 마침내 전쟁에 승리하였다. 이후 이들은 안전한 거주지를 얻게 되었고 신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백운석을 가장 높은 하늘의 신으로 섬기고 이러한 습관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주거: 강족은 험준하게 솟은 척박한 돌산의 허리부분, 세차게 흐르는 가파른 계곡 주변에 위치하여 있다. 주거지 외형은 일률적으로 중첩되는 형태로써 아랫부분은 넓고 위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모양이다. 가장 높은곳에는 사각형의 높은 석탑이 있고 집천장은 평평한 지붕이 있으며 외형은 사방입면체이다. 집천장은 대나루로 덮고 나무가지에 다시 진흙을 발라 굳혀서 만들며 일반적으로 이층이나 삼층으로 되어있다. 맨 윗층에는 양식을 보존하거나 손님방으로 쓰며 중간에는 주인이 살며 아래층에는 소와 양 닭들을 사육하고 농기구등의 연장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이층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 일층의 가축의 먹이로 쓰는 점은 상당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방 옥상에는 양식과 옷을 말리는 용도로 쓰이며 네모낳게 작은 창문은 사각뿔형태로써 안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형태로 이는 추위를 막고 도둑을 방지하기위해 설계되었으나 방안의 통풍과 조명 그리고 연기나 먼지등이 밖으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집 뒤쪽에는 사각형의 돌로 쌓아서 만든 탑이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계란형의 백색 돌, 속칭 계공석이라 부르며 ?
絹湧?이돌을 백석신이라 하여 하늘의 신으로 섬기며 매 명절 때 마다 제사를 지내므로 함부로 만지거나 파손하는 일을 금기로 하고 있다. 또한 강족주거지역으로 들어서면 멀리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주거지 안으로 끌어들여 건물 바닥 밑으로 물이 흘러가도록 물길을 뚫어놓아 이 물을 음용이나 화재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 설계한 강족 건축예술의 절정이다.
강족은 또한 가무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민족으로 그들의 노래는 소박하면서도 음역이 높지않은 것이 특징이다. 대표곡으로는 술노래, 산노래, 애정가, 노동가등이 있다
강족의 춤은 유희춤, 제사춤, 의식춤, 집단모임춤의 네가지로 분류되며 싸랑, 오추부, 커시거시, 하르등이 대표적인 춤의 이름이다.
강족의 민족 강족은 스스로를 일마, 일표혹은 유마, 얼마 등으로 부르는데 모두 동일한 명칭이다. 실은 강족은 타민족이 그들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강족은 양을 목축하여 살아왔으며 옛부터 강족과 양과의 관계는 밀접하여 지금까지 양을 신으로 섬기는 습관이 남아있다. 언어는 티벳어의 한갈래로써 남북 양대 방언으로 나누어져있다.
강족은 아직까지 신숭배, 조상숭배, 동물숭배등이 결합한 원시종교를 신앙하며 만물에는 영혼이 있고 많은 종류의 물건에는 영혼이 있다며 이를 숭배하고 있다. 강족지역에는 종교조직이나 사당이 존재하지 않안았지만, 하늘과 사람을 잇는 매개인 "서"라 부르는 무당이 있어 이 무당은 남성이 맡았으며,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었다. 경전은 상중하 모두 16부가 있었지만, 문자로 책이 되지 않았고 구전으로 지금까지 전해온다
경문은 운문으로 네자가 한 구를 이루고 두 구가 한절을 이룬다. 무당은 점을 보고 귀신을쫏고 마을의 화를 막으며 제사장의 역할을 맡는다. 강족의 가장 큰 민족명절은 제산회와 강년제인데 이 두 차례의 명절은 춘추로 나누어 치뤄 지는데 봄에는 바람이 고르고 비가 순조롭기를 바라고 추기에는 오곡이 풍성하게 해준대 대한 감사의 제를 지낸다.
제산회는 각 각 지역마다 열리는 날이 모두 다른데 정월 사월 오월등 매년 한 차례와 두 세차례 거행하는 등 제 각각이다.
현재 강족 주거지중 보존이 가장 잘된지역은 아무래도 도평 강족주거지인데, 이현 도평향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까지 여전히 고대의 풍경과 원시의 강족 촌락을 보존하고 있다. 도평강족지구는 성도에서 163킬로정도가 떨어져 있고, 현에서는 41킬로 떨어져있다
댓글목록

사천통 살모사님의 댓글
사천통 살모사 작성일^^;..함 오세요..ㅋㅋ..강족하면 중국에서 집잘짓기로 알아주죠..미로같은 강족마을 함 구경해보셔도 조오~~~쵸..^^;
조창완님의 댓글
조창완 작성일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 인상적인 말이 강족의 경우 건축물을 지을 때 측량 도구를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도 정확한 치수의 건물을 만드는 안목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런 재주를 가진 이유가 있겠지만 참 특이한 재주지요. 한번 도평 보러 갈날이 있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