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기 교수와 떠나는 한시기행-2] 둥팅후와 웨양로우, 그리고 삼국전장 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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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창완 댓글 0건 조회 2,351회 작성일 07-03-18 22:33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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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둘째 날 아침은 일찍 시작했다. 하루에 수백 킬로씩 움직이는 만큼 가능한 서두르는 게 맞기 때문이다. 창사를 벗어난 차는 잘 정비된 고속도로로 웨양(岳陽 악양)을 향한다. 창사에서 웨양까지는 150킬로미터 정도다. 창사를 벗어난 지 40분만에 차는 미루오(汨羅 멱라)와 핑지앙(平江)의 톨게이트를 지나간다. 원래 두 곳 모두를 넣고 싶었지만 시간상 불가능해 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코스다. 참가자들에게 두 곳의 의미만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 굴원과 두보의 묘를 지나서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난 굴원은 회왕의 신임을 받아 20대에 좌도라는 관직에 오르며 승승장구했으며, 30대에는 총리급에 해당하는 삼려대부라는 중책을 맡았다. 하지만 날로 강성해지는 진(秦)나라에 비해 초나라는 외교적 수단이 부족했고, 이 속에서 굴원의 견해는 채택되지 않고 오히려 귀향을 떠난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상처는 진주를 낳을 수 있는 힘을 주는데, 중국 문학사상 가장 걸작인 이소(離騷)와 구가(九歌) 역시 그런 상처로 만들어낸 걸작이다. 이소는 우선 창작의 범위를 신화를 비롯해 무술(巫術)의 세계로까지 확장했다는 것이다. "이소는 '불운한 인생'이라는 현실세계와 '신화와 전설'이라는 환상의 세계, '이성적 사유'라는 유가적 철학과 '시공의 초월'이라는 낭만적 상상력의 세계를 융합한 스케일 큰 작품이다. 그에 반해 또 하나의 대표작 <구가(九歌)>는 시간과 인간이 어울려 한바탕 해한(解恨)의 굿판을 펼치는 내용이다." (이승하 저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중에서) '산해경'(山海經)에 넓게 있는 중국 신화의 세계는 훗날 위앤커(袁珂)에 의해 '중국신화전설'로 다시금 정리될 때까지 동양 문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는데, 그 중간 다리 역할을 굴원이 한 것이다. 이런 명작을 남겼지만 굴원의 최후는 안타까웠다. 분에 못 이기고, 소외감에 빠진 굴원은 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죽은 시신을 건지기 위해 배를 빨리 모는 용선 경기와 물고기들이 시신 대신에 먹으라고 던진 종쯔(?子)를 문화적 유산으로 남겼으니 죽음마저도 신화가 됐다. 정확한 고증은 없지만 굴원의 묘와 그의 사당이 미루오 현 멱라수가에 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들릴 수 없다. 도로의 좌측 핑지앙에는 시성 두보의 묘가 있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천하를 떠돌다가 이곳의 쓸쓸한 객선에서 숨을 거둔 두보는 민초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시인이기도 했다. 한시기행이니 만큼 그것에 들러 그를 추념하는 게 옳겠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음을 한탄할 뿐이다. 안개 속 둥팅후와 오롯한 웨양로우
김풍기 교수가 우선은 짧은 탄식을 낸다. 수없이 많은 한시의 배경이 돼서 우리 시인 묵객들이 누구나 한번은 보고 싶어했으나, 우리나라에서 오기에는 너무나 먼길이어서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호수. 그런 호수를 볼 수 있다는 감회는 남다를 것이다. 약간 안개에 쌓인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 있다.
누각의 1층과 2층에는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가 같이 써 있다. 다만 아래의 것이 시간이 오래돼 갈거자(居)의 삐침이 길고, 위의 것은 기형처럼 짧게 되어 있다. 범중엄은 이곳을 보지 않고 이 글을 썼다고 안내원이 말하자 한 참가자가 득달 같이 "그럼 이곳에 와 봤으면 어떻게 이런 글을 쓰겠어. 그냥 안개 밖에 없는 것 같은데"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에 빠뜨린다. '악양루기'는 누각뿐만 아니라 둥팅후가 가진 문화적 깊이를 잘 표현한 글이다. 특히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거워 할 것이니라)는 시구에 담긴 뜻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登岳陽樓 악양루에 올라 杜甫 昔璞庭水 동정호 이야기를 예부터 들어온 터, 今上岳陽樓 오늘에야 악양루를 오르게 되었도다. 吳楚東南坼 오나라 초나라가 동남으로 갈라지고, 乾坤日夜孚 하늘과 땅, 낮과 밤이 그 속에서 뜨고 진다. 親朋無一字 친한 친척 친우들에게는 소식 한 자 오지 않고, 老病有孤舟 늙고 병든 몸 외롭게 쪽배에 의지하고 있다. 戎馬關山北 관산 북쪽에서는 아직도 전쟁 중, 憑軒涕泗流 난간에 기대서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린다. 누각에서 내려와 옆에 있는 주유의 부인 소교(小喬 일명 이교)의 묘를 본다. 사실 오후의 들릴 적벽도 미녀를 좋아한 조조가 이 소교를 얻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니, 서시(西施 오월 전쟁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4대 미녀중 하나)에 버금가는 경국지색임에 틀림없다. 사랑과 전쟁은 땔 수 없어
결국 촉은 이 과정에서 주유가 이끄는 오나라 군의 힘을 빌게 되어 적벽대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만을 몰살시킨 미녀도 시간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 청총(靑塚)은 이제 나무까지 무성히 자라 오는 객들에게 역사의 향취만을 말해줄 뿐이다. 몇은 소교 묘 옆 차관에서 '쥔산인예'(君山銀葉 군산은엽) 차를 조금씩 샀다. 쥔산은 일년의 대부분을 안개가 싸고 있어 이런 명차가 만들어질 수 있다. 안타깝게 이번에는 쥔산에 들릴 수 없다. 쥔산은 둥팅후의 중간에 있는 산이다. 전설에 따르면 남방에 간 순(舜) 임금이 길에서 죽자 그의 부인이 지아비를 사모해 남방에 가 죽었는데, 그 혼이 이 호수를 지키는 신이 되었다. 그 이름이 상군(湘君)인데 지금도 호수의 중간에 묘가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백도 이곳에서 '유동정'(遊洞庭)라는 시에서 "동정호 서쪽을 바라보니 초강이 분명하구나… 상군을 조문하던 곳이 어딜까"라고 시에서 읊었다.
전시관을 보고 비각으로 향했다. 웨양로우는 사실 중국 시인의 대부분이 경유했다할 만큼 시로 유명한 곳이다. 비각에는 많은 시들이 있는데, 김풍기 교수는 이백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의 여담까지 담아내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백도 이곳에서 시를 남겼고, 백거이(白居易, 772∼846), 이상은(李商隱, 812∼858), 구양수(歐陽修, 1007∼1072), 육유(陸游, 1125∼1210) 등 시대를 대표할 문사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시를 남겼다. 삼국을 나눈 치비 다시 늦도록 놀다가 웨양 시내에서 점심을 했다. 한 참가자가 이백이 먹던 술을 찾는데 없어서 후난의 술인 리우량허(瀏陽河)로 목을 축였다. 다시 차를 재촉해 치비(赤壁 적벽)으로 향했다. 아직은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곳이어선 지 작은 길로 한참을 달려야 창지앙(長江 장강)의 한 줄기에 있는 치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치비로 들어서는 길목은 수호지의 양산처럼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다시 산굽이를 지나면 '적벽대전 기념관'이 나온다. 조악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정세나 문물 등을 잘 정비해 놓았다. 김풍기 교수는 역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가 가진 차이부터 의미까지를 다양하게 설명한다.
적벽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당시 가장 큰 위세를 가진 조조의 패퇴는 강남에서 손권이 이끈 오나라의 위세를 정립시키고, 유비가 형주(荊州)를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 전투를 통해 진정한 위촉오 삼국지가 성립되게 되는 과정이다. 다만 삼국지 연의는 워낙에 큰 비중을 갖는 적벽대전으로 인해 흥미도가 떨어지는 전환점이 되는 싸움이기도 하다. 또 유비 진용 내부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객 신세를 면치 못하던 제갈량이 관우와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제갈량과 관우의 헤게모니 싸움의 중심은 화용도(華容道)를 통해서 이뤄진다. 후에 판소리 '적벽가'에 중심소재가 된 화용도의 현재 위치는 웨양 부근이어서 과거의 위치가 같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제갈량은 적벽에서 패퇴한 조조군의 퇴로에 각 장수를 배치하는데, 화용에 관우를 배치한다. 제갈량으로서는 아직 조조가 죽을 운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유비군 내부의 힘이라도 바꾸는데 그곳을 활용하는 것이다. 끊어지지 않는 이야기에 시간이 지체된다. 다시 급히 차를 몰아 우한(武漢)으로 향했다. 25살의 젊은 기사는 100킬로미터를 넘기지 않는 모범(?) 운전자다. 앞에 앉은 분들은 "나라면 200은 족히 밟겠다"는 푸념을 해댄다. 우한에 도착하니 밤 9시 남짓이다. 급히 식사를 하고 호텔에 향하니 11시가 되간다. 그래도 거기에서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밤에 길을 건너 번화가인 지앙한루(江漢路)로 향했다. 허름해 보이는 음식점에서 양꼬치를 비롯해 이런저런 음식을 시키고, 잔을 들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바이주 병이 비어진다. 한중일 삼국의 미래는 무엇일까
여행이 끝나고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한 중국 해군의 한 함장(艦長)과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웨에루슈위앤의 안내서가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젊지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였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근성이 계속되는 한 중국과 일본의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봤다. 이야기 속에서 그는 한국이 꼭 중국과 보조를 맞춰줄 것을 부탁했다. 사실 원자탄은 물론이고 수소폭탄까지 보유한 중국이 근세에 당했던 치욕을 다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최대의 전쟁이 불가능하면 최소한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결국 중간에 있는 우리 나라만 위기 속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사실 초반기에 강한 힘을 얻은 일본은 조조가 이끌던 위나라에 가깝다. 반면에 큰 인프라를 바탕으로 성장한 중국은 오나라에 가깝다. 별다른 자원과 지지가 없이 힘을 얻지 못하는 우리나라는 촉나라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과거와 같은 무력 전쟁이 아니더라도 위기나 대결은 항상 내재해 있다. 특히 일본이 과거와 같이 전쟁을 국력으로만 한다고 생각하면 위기는 더욱 더 빨리 올 수도 있다. 이런 원인 때문인지 제갈량이든, 방통이든, 주유든 명장과 명지략가는 필요한 건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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