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스폐셜 '김산' 특집이 7월 30일 토요일 오후 8:00 방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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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창완 댓글 0건 조회 1,243회 작성일 05-07-29 09:4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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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답답함 속에 살던 이들에게 대학시절 비밀스럽게 읽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한줄기 신선한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무정부주의나 공산주의 등을 선택했지만 중국 혁명의 핵심에 들어가 항일전쟁을 주도했다.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마지막 한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이국의 거친 산하에 묻힌 김산의 삶은 감동 그 자체였다. 뛰어난 지성인이기도 한 김산은 다행히 옌안을 찾은 저널리스트 님웨일즈에게 그 기록을 남겼다. ‘중국의 붉은 별’의 작가인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인 님웨일즈는 중국 혁명의 근거지들을 취재하며, 수많은 혁명가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옌안 루쉰도서관에서 영문 책을 주로 빌려간 인물 하나를 주시했다. 그러던 중 어렵게 만난 김산에게 호기심을 갖고 그를 기록한다. 22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을 기록했고 이는 훗날 김산-님 웨일즈 공저로 ‘아리랑’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된다.
조선인으로 중국 공산당 베이징 조직부장은 물론이고, 중국 초기 혁명에서 빼어난 실적을 올린 김산의 존재는 사실 우리 대학생들에게 너무나 낯선 존재였다. 더욱이 한국 역사학자 가운데도 김산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이 없었다. 오랫동안 김산을 연구한 이회성을 비롯해, 최근에는 한홍구 교수나 홍정선 교수 등이 김산을 연구해 글을 내놓고 있지만, 워낙에 많은 가명 등으로 인해 실체를 접근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기자는 얼마 전 ‘KBS 스페셜’의 취재진과 김산의 행적을 쫓는 긴 취재길(담당 양승동 PD)을 동행했다. 대학 시절의 감동을 기억하며 찾아가는 길은, 대학시절 아리랑의 독서기억보다 나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벅찬 여정이었다. 취재의 여정을 되살리며,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았던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 전사를 되새겨 본다. 광둥, 항일 위해 이념을 뛰어넘어
취재진은 그의 여정 가운데 가장 극적인 광저우와 하이펑(海豊)을 꼼꼼히 돌아봤다. 당시 광저우는 혁명가들의 집산지였다. 김산이 광저우에 도착할 당시에 60여명의 좌우익 전사들이 있었으며, 1927년에는 그 숫자가 800명에 이르렀다. 1927년 4월 15일부터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광주 꼬뮌’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사망했다. 중국 혁명가들도 1927년 12월 10일을 기점으로 반격을 시작한다. 조선인 전사들 역시 대대적으로 이 봉기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광저우를 장악하지만 차츰 한계에 부딪힌다. 특히 장타이레이(張泰雷) 등은 혁명의 진행방안을 혼동한다. 조선인 전사들은 13일 6시경 황화강(黃花崗)에 집결하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최후 격전장이 됐다. 사실 3000여명의 기의 세력 가운데 적지 않은 조선인이 있었고, 황화강에서만 150여명의 조선인 전사들이 희생됐다. 이를 기리기 위해 광주기의열사능원(广州起義烈士陵園)에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이 세워졌다.
이곳 사람들은 ‘조선인 동지 환영회’를 여는 등 조선 전사를 환영한다. 김산은 혁명재판소의 7인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는 등 나름대로 평안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국민당의 정규군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김산 역시 고통스런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중국에서도 가장 남부에 속한 광둥의 이 외딴 지방은 중국 공산당에게는 초반기 혁명 성지 가운데 하나다. 취재진은 홍군의 주기지였던 홍궁(紅宮)과 김산이 한때 머물렀던 펑파이의 옛집 등지를 방문했다. 하이펑 시의 공산당사에도 김산의 가명이 있고, 관계자들 역시 김산에 관해 설명한다. 해방을 위해 찾아와 피를 합친 조선인에 대한 진실한 고마움이 몸으로 느껴졌다. 하이펑에서의 싸움도 역량의 차이로 수세로 몰린다. 김산은 인근 산에서 피신하는 등 시간을 보낸다. 극도의 식량난을 겪으면서 적의 식량을 탈취해 떠나는 최후의 계획을 세우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결국 바닷가로 나와 홍콩으로 탈출한다. 베이징 인근, 초기 혁명 전사로서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국민당에게는 단순히 공산당 사상을 연구하는 이로, 일본군에게는 단순 무정부주의자로 보이면서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톈진을 거쳐 조선의 신의주로 가서 고문과 심문을 당한다.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내고, 1931년 4월에 석방되어 고향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고, 6월에 베이징에 돌아온다. 조직부장까지 지낸 김산의 귀환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배신의 의심까지 받았지만 김산으로 인해 체포된 인물이 없는 등 결백하다고 인정된다. 하지만 조직에 지친 김산은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3~4시간 거리에 있는 바오딩의 사범학교 선생을 지내면서 화북지방의 활동을 주도한다.
1933년 4월 김산은 다시 북경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 당하지만 입을 열지 않는다. 결국 일본에 넘겨져 조선으로 가는데 다행히 이번에도 그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1934년 1월, 일본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으로 탈출한다. 두 번째 귀환은 그에 대한 의심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때 중국 여인 조아평을 만나서 결혼한다. 다행히 그녀는 김산의 아들을 임신하는데, 김산은 아이의 존재도 모른 채 공산당의 정착지인 옌안(延安)으로 향한다. 옌안에서 그는 홍군 전사를 기르던 군정대학에서 교수로 일한다. 이곳에서 그는 님 웨일즈를 만나는데 22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인생 여정을 설명한다. 물론 보안의 문제가 있어서 출판시기를 2년 뒤로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님웨일즈는 위대한 전사의 미래를 의심치 않고, 돌아가 저술 작업을 한다. 하지만 김산은 다음해 캉셩(康生)의 지시로 전장으로 떠나는 길에 극비리에 처형된다. 김산의 최후는 중국공산당학교의 교수였던 최용수 선생이 자료실에서 그의 처형을 지시한 문서를 찾아냄으로써 밝혀졌다. 과연 김산은 왜 처형됐을까. 중국 공산당도 1983년 1월 27일에 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라며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김산의 흔적을 보고 나서
이번 KBS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김산의 투쟁은 다시금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울 것이다. 사실 김산은 거대한 샨베이의 고원에서 극비리에 처형되어 무덤조차 없다. 김산이 처형된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인 샨베이의 한 고원에 섰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어찌 보면 위대한 혁명가를 알아주지 못했던 고국에 대한 서러움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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