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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창완 댓글 0건 조회 7회 작성일 25-08-1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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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언론창-알자여행 공동진행 테마여행

<백두산과 고구려,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첫째날, 8월 4일)

-맹호와 독수리가 날 뛰던 시대의 영웅 양세봉 장군을 기억했으면


교육언론창과 공동으로 진행한 테마여행의 두 번째 진행자는 나로 했다. 어떻든 지난 25년간 중국 전문가로 살아왔고, 중국 관련서만 12권을 낸 것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 때문이겠지만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역시 잘 모객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교육언론창 측의 과도한 노력으로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테마여행을 진행하는 것은 준비부터가 정성이 필요하다. 온라인에는 80쪽 분량으로 여행 안내책을 만들었지만 지나치게 많아서 50여 페이지로 줄여서 휴대용 여행책자를 만들었다. A4 용지를 접어서 만드니 크기도 적당하다.

내가 진행하는 여행의 테마는 3가지다. 우선 양세봉 장군을 중심으로 서간도 항일운동 유적지를 이해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두 번째는 집안 등 고구려유적지의 소개와 답사다. 세 번째는 한중관계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국 동포들에 대한 이해까지 추가했다. 결국 주제가 많다는 것은 하나도 건질 수 없는 위험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또 내가 역사 전공자가 아닌 만큼 관련 지식의 깊이가 낮을 수 밖에 없다는 문제도 있다. 거기에 이번에 참가한 분들은 대부분 선생님들인 만큼 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학창 시절에 성적도 별로인 내가 최고 우등생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별 걱정은 안했다. 똑똑하다는 것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8월 4일(월) 첫째날, 선양으로 이동해 통화까지

해외 여행의 첫날과 마지막날은 보통 이동을 위해서 쓰는 일이 많다. 중국은 상대적으로 가까워 극복하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도 어쩔 수 없었다. 한주가 시작되는 4일 나는 다시 인천공항 2터미널에 있다. 이번 여행에는 아내와 용우도 동행하기로 했다. 인원이 많지 않아, 우리 가족 여행을 겸하기로 했다. 더욱이 아내는 책상에 앉아서 여행사를 운영하다보니 백두산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용우도 지난해 가을에 백두산과 지안 고구려 유적을 답사했는데, 날씨로 인해 천지 입산 자체가 금지된 만큼 흔쾌히 동행을 결심해줬다.

우리 가족을 포함해 17명은 예정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해 주셨다. 이번 여정에는 앞 열하기행에도 동행했던 두 분이 있고, 용우의 대학 후배인 해준이 모자가 동행한다. 해준이 아버지는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친하게 지낸 형이고, 형수도 비슷한 일에 종사해 여행에 합류해 준다해서 더없이 반가웠다. 다만 다른 고객들에게 부담이 될 것을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인천공항의 혼잡으로 조금 지체되어 비행기가 출발했다. 선양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공항밖으로 나오니, 이미 4시가 넘었다. 중국 동포인 박경일 가이드가 우리를 맞았다. 해가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면 왕청문에 있는 양세봉 장군 기념비를 보기로 했지만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더욱이 신빈 쪽 고속도로가 수리 중이어서 그 시간에 닿기는 무리였다. 우선은 바로 출발했다.

공항에서는 얼굴만 스쳤으니, 우선 인사를 했다. 아울러 참석한 17명의 동행을 이름 만으로 간단히 인사하도록 했다. 5일을 같이 하는 인연은 만만치 않다. 더욱이 여행의 동행 가운데, 까다로운 분이 있으면 여행 전반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나는 이번 여행의 의미를 크게 두가지로 설명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대부분 양세봉 장군을 모르실 겁니다. 양세봉 장군은 우리나라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묻히신 분입니다. 남북에서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지만, 학교에서조차 잘 배우지 않은 이분의 삶을 이해하시게 하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양세봉 장군과 김일성과의 인연 때문에 우리 제도권 교육에서는 의도적으로 조선혁명군 총사령인 양장군을 가르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삶 자체가 인간적으로도 성숙된 것 뿐만 아니라, 한중 협력의 사례이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역사 인물입니다. 또 하나는 중국에 대한 여러분의 선입견과 편견을 없애고,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중국을 잘 알아야 한중관계를 잘 풀어갈 수 있습니다.”

 

신빈 왕청문에 있는 양세봉 장군의 석상. 왕청문 인민정부가 세웠다. 오른쪽이 옛 화흥학교 터에 있을 때의 모습이고, 왼쪽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 뒤 모습니다. 석상에는 '항일명장 양서봉'이라 써 있다.

그의 동상을 들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우선은 양세봉 장군 이야기로 시작했다. 양세봉(梁世奉, 梁瑞凤 1896년~1934년) 장군은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연산리에서 5남매(4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철산군은 신의주에서 평양 방향으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가난한 그의 집은 양세봉이 16세가 되던 191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고 더욱 곤궁해졌다. 20살에 윤재순과 결혼한 양세봉은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뎬(寬甸), 환런(桓仁)을 거쳐 용링(永陵)에 도착했다.

신빈 만족 자치현에 속한 용링(永陵) 허루아라성(赫图阿拉城)은 1616년에 누루하치(努尔哈赤 1559~1626)가 금나라를 세운 곳이다. 신빈을 좁게 느낀 누루하치는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전인 1625년 선양궁을 완성해 그곳으로 천도한다. 다음해 누루하치가 사망하고, 홍타이지(崇德帝 1626~1643)가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는 1634년에 허루아라를 흥경(兴京)으로 고쳐부르고, 군대를 주둔시킨다. 양세봉 일가가 이곳에 올 때는 당연히 무너진 왕조의 고향이 제대로 보존될 리 만무했다. 양세봉 일가가 이곳에 온 후 여유를 내어서 허루아라성에 여행을 왔다. 처음에는 관리하는 병사가 막아서 못 보게 했지만 양세봉이 용기를 내어 부탁해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는 내용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에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양세봉 장군을 잊어갈 때, 그를 다시 살린 것은 만주족 출신의 조문기 작가다. 요녕성 항일연군사연구중심 상무이사 등을 지낸 조문기 연구원은 민예총과 동북아연구재단의 후원을 받아 다양한 구술 기록 등을 정리해 2007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을 출간했다. 나는 책이 나오기 전인 2005년 6월 신빈을 방문해 조문기 연구원을 만났다. 국내 항일연구가로 손꼽히는 동북아연구재단 장세윤 박사, 경향신문 학술담당 조운찬 기자와 함께다. 난 당시 현장 안내를 했는데, 양세봉 연구자인 조문기 연구원을 인터뷰했고, 나 역시 그때 양세봉 장군을 처음 알게 됐다. 이후 2007년엔 조문기 연구원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을 내놓았고, 장세윤 연구원 도 2016년 <양세봉>(부제: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을 출간했다.

-용링과 왕청문, 양세봉 장군의 근거지

용링휴게소에 있는 누루하치 동상. 누루하치가 세우고, 후금을 세운 것을 기념한다.

우리가 신빈의 입구인 용링휴게소(永陵服务区)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휴게소에는 누루하치의 동상이 서 있어서 그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일단 양세봉이 초반기 영릉을 구경왔을 때 에피소드 등을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면 긴 시간도 아니었다.

“양세봉 장군의 이야기는 오래전 역사가 아닙니다. 불과 100년전에 이곳에서 활동했고, 90년 전에 41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그후 한참이 지난 1945년에 해방됐는데, 여전히 일본을 가볍게 보고, 중국도 가볍게 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 저희 세대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중국을 봐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신빈으로 이주해 살면서 양세봉은 독립 활동을 만나게 된다. 독립단도 어떤 일에도 자신감이 있는 양세봉의 입대를 권유한다. 1922년 초겨울 양세봉은 조선으로 건너가 천마산 독립군이 된다. 다음에 일본의 토벌작전을 피해 중국 동북으로 돌아온다. 성실한 양세봉은 1923년 소대장에 임명 되고, 1924년 여름 3중대장, 1929년 1중대장과 부대장이 된다. 성실한 자세와 인선으로 주변에 인정을 받은 것이다. 1931년 12월에 주요 지도자가 체포된 뒤인 1931년 1월 상순에는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임명된다. 이후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제가 양세봉 장군의 삶에서 가장 높게 사는 부분은 한중연합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양세봉 장군은 중국인 지도자 왕동헌과 가깝게 지냈고, 이춘윤(李春润 만족 1901~1933), 이홍광(李紅光, 조선인 1910~1935)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항일전사들과 협력했고, 동북항일연군의 대표적인 지도자 양징위(楊靖宇 1905~1940)와도 깊은 교류를 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천고’ 등에서 주장하던 조선과 중국이 힘을 합쳐서 일본을 몰아내는 실질적 활동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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