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고구려,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둘째날, 8월 5일) [출처] <백두산과 고구려,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둘째날, 8월 5일)| > 알자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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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창완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8-1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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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고구려,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둘째날, 8월 5일)

-장수왕릉, 광개토대왕릉비를 친견하다

통화에서 집안까지는 과거 2시간 정도 거리였지만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한시간 정도면 닿는 거리가 됐다. 내가 처음 지안을 방문한 것은 2000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후 5차례 정도 방문했는데, 이 시간이 중국이 진행한 동북공정과 겹친다.

중국 인문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는 2002년부터 동북지역 3개 성과 연합하여 동북지역의 역사와 당대 문제를 연구하는 동북공정을 시작한다.

연구하기 위하여 2002년부터 시작한 대규모 중국정부프로젝트이다.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의 약칭으로, 동북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사회주의 중국의 통일 강화를 명분으로 추진된 학술연구이지만, 한국인의 뿌리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서의 한민족 역사 형성과정을 부인하는 역사인식을 드러내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켜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처하고 있다. 정식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인데, 약칭해 동북공정(东北工程)으로 부른다. 중국은 동북공정 이전인 2015년부터 ‘서남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西南边疆历史与现状研究工程)을 진행했다. 소수민족이 많은 윈난과 광시성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두 지역은 특징으로 본다면 모국을 가진 소수민족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56개 민족이 뭉쳐 있는 중국에서 분열은 국가 발전에 가장 큰 문제라는 인식을 학술까지 끌어들이는 사례다. 결과적으로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연구하는 이 프로젝트로 인해 한구도 ‘동북아역사재단’을 만드는 등 대응을 시작했다.

장수왕릉에서 단체사진

아침 아홉시가 조금 넘어 우리는 가장 빠른 방문객으로 지안의 고지대에 위치한 장수왕릉을 방문했다. 과거 장군총 등으로 불렸지만 중국 정부는 장수왕릉으로 공식 명칭을 정했다. ‘동양의 피라미디’라는 별칭을 가진 장수왕릉에 들어갔을 때 가장 큰 변화는 주변이 숲으로 조성됐다는 것이다. 과거 지안의 고지대에서는 장수왕릉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숲으로 장수왕릉이 더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위용도 사라진 느낌이라 많이 아쉬웠다.

 

왼쪽은 이번방문길에 찍은 장수왕릉이고, 오른쪽은 15년전 방문했을 때 사진이다. 주변에 나무를 심어서 위용이 줄어든 측면이 있다. 오른쪽 석실로 가는 사람을 볼 수 있듯이 과거에는 석실로 접근을 가능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무게 문제를 생각하면 옳은 조치다.

우리가 들어가자 직원이 우리를 동행하고, 한국말로 해설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물론 태극기나 프랑카드를 갖고 사진을 찍는 행위도 금지시켰다. 우리는 조용히 담소를 나누면서 장수왕릉과 배장무덤, 우물, 제단 등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장수왕릉의 주인이 누군지는 아직 100% 확실하지 않습니다. 묘지석 등 명확한 유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 가는 광개토대왕릉비(중국명 호태왕비)는 장수왕릉보다 아래에 있어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동행한 용우 학교에서도 교수님들이 이 무덤의 주인에 대한 다양한 설을 내놓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두 모덤 모두 광개토대왕릉이나 장수왕릉이 아니라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장수왕릉 배장무덤(좌상)과 우물(우상), 제단(좌하), 무게를 이기는 덧돌(우하)

우리는 금방 광개토대왕릉비에 도착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내부에서 한글 해설을 못해도, 사진을 촬영해 허락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비각 안에서 일체 사진을 못 찍게 했는데,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다만 옆에서는 중국인 가이드가 포인터로 비석을 가르키며, 해석을 하고 있어서 부러웠다. 처음 왔을 때는 사진기가 좋지 못해서 처음으로 비석의 4면을 촬영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 비석의 탁본을 팔기도 했다. 1000위안 정도로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지만, 탁본이 불가능한 지금 상황을 고려하면 귀한 물건이 됐다. 일본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비문을 조작해서 임나일본부설을 만들기도 한 만큼 우리나라에는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호태왕릉비를 보고, 무덤까지 같이 봤다. 가는 길에는 용조괴(龙爪槐) 나무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회나무의 일종인 이 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향해 황제에 대한 낮춤을 의미해 황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라고, 동행한 심선생님이 보충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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