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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고구려,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다섯째날,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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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창완 댓글 0건 조회 14회 작성일 25-08-1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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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고구려,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다섯째날, 8월 8일)

아내는 항상 호텔 조식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이번 여행에서 호텔이 좋음에도 ‘호텔 모닝’을 느낄 수 없었다. 다행히 마지막날은 느긋하게 호텔 조식을 즐기기로 했다.

 

쉐라톤 호텔 로비와 호텔 방에서 바라본 훈남

쉐라톤 사우스시티 선양은 잘 정돈된 호텔이었다. 관광지가 아니니 지나치게 사람도 많지 않고, 식당도 컸다. 여유롭게 아침을 즐기는 곳이다. 방에서 훈남구 남쪽을 바라봤다. 계속해서 아파트촌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저 아파트 너머로는 고구려 백암산성도 있다. 이 산성은 안시성을 지나, 따리엔 ‘대흑산성(大黑山城)’으로 이어진다. 고구려의 서쪽 방어막인 셈이다.

-1억명 동북3성이 자존심을 지키다

우선 심양고궁을 방문했다. 심양 고궁은 지금으로 꼭 400년전에 누루하치가 옮긴 수도다. 이후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겨갔지만 성경(盛京)으로 불리면서 청나라 마음에 고향 노릇을 했다. 일제 시대에는 봉천(奉天)으로 불리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베이징을 육로로 갈 경유 경유하는 곳이니 당연히 흔하게 불리는 지명이다.

선양의 지금 인구는 924만명으로 많지 않지만, 랴오닝성(4155만명), 지린성(2317만명), 헤이롱지앙성(3029만명) 등 1억명 인구의 동북3성의 관문도시라는 자존심이 있다. 우리 언론도 특파원을 잘 파견하지 않은데 200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를 시작으로 특파원을 보낼 때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친한 동생인 조계창 기자가 이곳에 특파원으로 왔는데, 귀임을 얼마 앞두고, 옌지에서 투먼으로 가는 미니버스가 미끄러져 안타깝게 사망한 슬픈 기억이 있다.

 

봉황루 들어가는 인파와 건륭제가 쓴 '자기동래' 편액

선양 고궁도 들어서자 마자 중국 관광 인파를 실감했다. 긴 줄을 한참 헤맨 후 내부로 들어갔다. 각 건물마다 줄을 선 상황이라 도저히 단체로 여행을 할 수 없어서 중심 전각인 대정전(大政殿)앞에서 자유시간을 주어 여행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봉황루 쪽으로 들어갔는데, 사람들로 인해서 둘러보기도 힘들었다. 봉황루에 있는 자기동래(紫氣東來)는 건륭제가 쓴 글인데, 紫자가 특이해 눈에 더 띈다. 이 글은 노자가 함곡관에 도착할 때 동쪽에서 상서로운 빛이 있어 나온 말이다.

 

자오본산의 공연장인 다우타이와 중지에

고궁에서 나와 심양의 명동 중지에에서 자유시간을 잠깐 보냈다. 대형쇼핑센터도 들어서서 옛날 느낌이 없다. 자오번산의 공연장이 화려한 외양을 자랑한다.

-멀리서 북한 종업원을 보다

선양 서탑 코리아타운 입구

마지막 식사는 서탑에 있는 한국 불고기집에서 하기로 했다. 그래도 코리아타운의 면모가 남은 게 감사했다. 서탑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코리아타운 중 하나다. ‘삼천리’라는 브랜드의 불고기 집은 크게 성공해 수백개의 체인점을 두기도 했지만, 이제는 대부분 도산해서 옛 영화를 잃었다. 그래도 선양에는 몇곳의 가게가 남은 것 같아서 안심이었다.

지난 8년간 진행된 중국 내 한국사회의 붕괴는 상당히 안타깝다. 2017년 성주에 사드가 배치된 후 중국 속 한국 사회는 순식간에 몰락했다. 우선 기업이 위축됐고, 유학생도 급속히 줄었다. 100만명에 달하던 중국내 한국인의 숫자는 이제 많아야 20만명, 적으면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10만명에 달하던 중국 유학생 숫자도 이제 1~2만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그 시작점은 분명히 사드다. 문제는 이 결과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험하게 하는 상황을 빚어서는 안된다.

평양관과 손님을 가다리는 북한 종업원

우리가 밥을 먹은 해운대의 맞은 편에는 북한 음식점인 평양관과 모란각이 있다. 과거 출입이 자유로울 때는 자주 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중국말을 하면서 들어가면 모르겠지만,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한복을 다소곳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눈 앞에서 손님을 안내하고 있었다. 선양의 북한 음식점도 들렸지만 베이징에 있는 다양한 북한 음식점도 많이 왕래했다. 어떨 때는 쌀쌀 맞은 표정이었지만 대부분 한 민족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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