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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고미숙과 떠나는 열하기행 -문화중 교사 김지선]사람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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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창완 댓글 2건 조회 893회 작성일 10-08-3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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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열하기행


- 사람을 만나다 -



문화중학교 교사 김지선



1. 경계에서



이 강물은 두 나라의 경계선으로서, 경계란 물이 아니면 시울이 될 것 아닌가? 도대체 천하 백성들이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저 강물 시울 짬과 같은 것일세. 도를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저 물시울 짬에서 찾아야 될 것이네.


(열하일기 上 ‘도강록’ 중 30쪽 -보리출판사-)



어둑하던 기운이 걷히고, 회색빛으로 물든 인천공항이 제 모습을 보일 때 3시간 30분 만에 공항에 도착했다. 시계는 정확히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다. 새벽길이 막힘없이 시원하게 트였다지만, 기사님의 능력을 칭찬하기에 앞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쾌속(과속?)질주에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속도를 느낄 틈 없이 곤히 잠들었지만, 동승한 몇 분의 선생님들은 긴장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새벽녘의 공항은 한산했다. 여행사와 약속한 ‘L카운터’에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렸다. 약속 시간은 7시. 중국 여행은 세 번째지만 인천공항을 경유한 것은 처음인지라 그 규모에 감탄하며 은행이며, 음식점, 카페, 화장실 등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2월부터 쉼 없이 달려온 열하모임(광주국어교사모임 고전문학기행-이하 ‘고전모임’)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는 기쁨에 기다림도 지루하지 않았다. ‘일야구도하기’, ‘야출고북구기’, ‘호곡장론’, ‘허생전’, ‘호질’ 등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열하일기>를 부분으로 더듬기만 했기에, <열하일기>는 미지의 신세계이고, 갈증을 부르는 오아시스였다. 마침 보리출판사와 인연이 있어 <열하일기> 두꺼운 양장본을 상, 중, 하 세 권으로 소장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소장’만.



하지만 모임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 올 수 있었다.


“혼자 읽으면 어려우니 함께 읽어 볼까?”하며 평가회 자리에서 던진 말이 사람을 모으고, 배움의 열정을 현실로 만들었다. 광주국어교사모임을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지치지 않았던 힘은 바로 ‘사람’과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배움과 나눔이 생활이 되고 철학이 된 사람들이 모여 아이들을 생각하고, 수업을 고민하며, 배움을 나누는 모임이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자부한다. ‘고행(고전문학기행)모임’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2월에 첫 모임을 갖고, 3월부터 먼지만 쌓여 있던 보리출판사의 <열하일기>를 한 장 씩 열어 나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본이면서 우리말을 잘 살린 북한 작품(리상호 옮김)이라는 것이 박지원의 숨결을 제대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더 큰 기대를 갖게 했다. 그린비 출판사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로 모르는 내용을 보충하기도 하고,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함께 읽으며 고미숙 선생님의 열정과 찬탄을 나누어 갖기도 했다. 그리고 그린비 출판사의 무료 동영상 ‘열하 강의’(각 회별 70분 이상의 대단한 동영상)로 부족한 목마름을 채워 나갔다.



10~12명 정도의 선생님이 매달 함께 했고, 특히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문희숙 선생님과의 인연은 매 모임마다 감동으로 다가왔다. 전남 보성여중에 재직하고 계시면서 한 달에 한 번 광주까지 달려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우리에게 깊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열하’를 보여 주신 호모 쿵푸스 문희숙 선생님! 선생님으로 인해 연암의 안의현에서의 발자취와 <연암집>, 박제가의 <북학의>, 그리고 김탁환의 열하 시리즈까지 맛 볼 수 있었다. 비록 여행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열하까지 깊이 있는 발걸음을 함께 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렇게 읽어나가다 실제 열하기행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자료를 수집하다 2004년 중국 전문 여행사 ‘알자여행’에서 김풍기 교수님을 모시고 ‘열하기행’을 다녀온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사에 연락해 보니, 올해에도 여행계획이 있다고 했다. 진정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그리고 고미숙 선생님과 함께 하는 여정이라니! 모임에 가속도가 붙었다. 흥분과 설렘으로 모임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열하’를 읽어가며, ‘열하’를 기다렸다.



공항을 둘러보며 1시간 남짓 기다리는 동안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온 강현(신광중, 필자의 남편, 소심하지만 맡은 일은 책임을 다하는 믿음직한 광주모임의 회장님), 김은희(고흥 도화중, 거리의 문제로 인해 모임은 함께 못했지만 모임 첫 시작부터 마음만은 함께 하고 책을 읽어 나간 참하고 귀여운 선생님)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임 회원들이 하나둘 씩 모이기 시작했다.


김수현(성덕중, 언제나 차분하고 배려심이 강해 맏언니처럼 우리 모임을 챙겨주신다), 정수희(치평중, 욕심이 많아 문어발처럼 여러 모임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절대 허투루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 범혜영(각화중, ‘열하일기’를 손으로 옮겨 쓰는 과도?한 애정행각을 펼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며 해외에 나가면 ‘울증’에서 급‘조증’으로 전환하는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 장수미(화정중,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성격에 적극적인 실천력으로 ‘고행’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다), 김선희(무진중, 승덕 이후 저질체력의 진수를 보여주었지만 서글서글한 성품으로 믿음을 주고 있다), 한선희(전자공고, 또 다른 저질체력의 소유자로 여행말미 고열로 인해 검역을 통과하지 못해 병원으로 급행했지만 그 정도로 ‘열하’에 열정을 쏟아 부은 조용한 투지의 소유자), 옥현정(무진중, 김선희 선생님에 이끌려 모임에 참여한 정보 선생님, 필자와 초등,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알고 모임의 중요성을 또 한 번 느끼게 했다), 윤민광(성덕중, 김수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온 지리 선생님으로 해박한 해외여행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문수미(진남중, 절대 동안의 소유자로 안정적인 분위기로 여행을 이끌어 주셨다) 선생님까지 모두 12명의 선생님이 모였다.


하지만 문제는 ‘알자여행’ 조창완 사장님!


7시까지 만나기로 했는데, 40분이나 시간을 넘겨 도착했다. 불만이 많았지만, 팬더같이 수더분한 모습에 정신없이 여권을 챙기고, 바쁘게 항공권을 끊는 모습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조용하고 수줍은 성품일 것 같은 예상은 빗나가고, 4박 5일 동안 정말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도진순(창원대) 교수님과 버스에서 번갈아가며 중국에 대한 지식을 해박하게 쏟아내던 모습(주로 서술어가 없이 문장을 건너뛰어서 듣는 내내 힘들었다는 일부 선생님의 의견과 현대 중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 좋았다는 일부 의견이 양분하고 있다, 또는 내내 졸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기도 하다)과, 동생 같은(실제로 형동생 하는 사이) 가이드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던 순박한 사장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여행지마다 단체 사진을 찍어주고 여행 직후 멋진 사진을 바로 메일로 보내주는 센스와 함께,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리고 중국에 대한 책을 다수 집필한 이력들은 단순히 이윤을 보기 위해 여행사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조창완님의 블로그를 살펴보면 엄청난 내공을 느낄 수 있다. http://blog.naver.com/chogaci,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직접 집필한 12권의 중국 관련 책이 일간지에 소개되고 있다) 나중에 승덕 호텔 뒤풀이 자리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이번 여행의 이윤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충격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존경심이 일기도 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9시 40분. 짐을 먼저 부치고 탑승 수속을 마치고 다시 기다림으로 이어졌다. 면세점이 즐비하지만 무언가를 사기엔 이르다는 생각으로 그냥 비행기 탑승을 기다렸다.


<열하일기> 첫 시작인 ‘도강록’ 부분에서 연암이 수석통역관인 홍명복에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도(길)’는 바로 저 도도히 흐르는 압록강의 물시울 짬(사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고미숙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것과 저것, 그 양변을 떠난 제3의 변이형’이라 말한 ‘매 순간 삶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진리’의 도(道)!


‘길(도)’을 찾는 여행자로서 알듯 모를 듯 그 뜻이 희미하게 다가오지만, 지금 시대의 ‘경계’에 선 나는 ‘물시울의 짬’에서 사람이 흐르고, 인종과 국가가 역동적으로 흐르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경계는 구분이 아닌 만남과 교류와 화합의 도가니였음을.


그렇게 베이징 행 비행기에 올랐다.



2.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을 보다



수레를 몰아 정양문을 나서서 유리창을 지나면서 몇 칸이나 되냐고 물었더니 누가 대답하기를, 도합 27만 칸은 된다고 했다. 대체로 정양문에서 선무문까지 가로 겹쳐 다섯 동리가 다 유리창이라고 하여 천하의 재화와 보물은 여기 다 몰려 쌓였다는 곳이다.


나는 어느 다락집에 올라가 난간을 기대고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 여한이 없을 것이거든!”


(열하일기 上 ‘관내정사’ 중 412쪽 -보리출판사-)



이번 여행의 목적은 연암처럼 호기심 가지고, 기록하기였다. 그의 학식과 안목, 글솜씨, 유머, 철학, 세계관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 <열하일기>에서 보여주었던 호기심과 사교성, 철저한 기록자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따라잡고 싶었다. 여행준비물 1호로 준비한 수첩을 들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렇게 4박 5일을 연암처럼 고스란히 담아보리라 결의했건만, 지금 생각해 보건대 ‘호기심, 사교성, 기록, 주량’에 모두에 걸쳐 절대적인 ‘범인(凡人)’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드디어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규모가 인천공항보다 큰지 비행기에 내려 모노레일열차를 타고 한참 만에 짐을 찾고 입국 수속하는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공항을 나서니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몸집이 자그마하면서 강단진 인상을 가진 조선족이었다. 이름은 ‘정현자’. 연길 연변대학을 나와 유치원 교사로 일하다 베이징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버스에 올라타고 이동을 하자마자 가이드로서 역할을 잊지 않고 중국에 대한 상식을 쏟아낸다. 가이드만의 패턴화된(?) 연변식 사투리에 간결하고 다부진 말투.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또박또박 전해지는 말소리가 천상 교사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먼지가 많고 메마른 기후로 인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심의 가로수를 호위 삼아 베이징의 중심부로 이동하였다. 앞좌석이나 중간 통로 앞의 좌석은 보험에서 제외되기에 가급적이면 앉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960만㎢의 광활한 땅에 14억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이 많은 나라 중국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도심의 모습을 살폈다. 암탉의 모양에 비유한 중국 땅에서 흑룡강, 길림성, 요녕성, 내몽고 자치구, 신강 위구르 자치구, 티벳 자치구, 복건성, 광동성, 홍콩, 대만을 머릿속으로 찾아보지만 매캐한 매연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지고 만다.



장기판과 같은 도시 베이징. 2008년 올림픽을 정점으로 과포화 상태에 이른 비대한 도시의 중심부로 달려가 점심을 먹었다. 비행기에서 늦은 아침을 든든히 먹었기에 점심에 대한 생각이 그다지 간절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만나는 현지식이라 기대가 컸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기자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예의 그 원형의 탁자에 예전(2006년 1월 장가계 여행)에 비해 그다지 진하지 않은 향을 가진 중국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행용 고추장을 준비했지만, 첫 식사부터 꺼내든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중국 특유의 향이 많이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올림픽 이후로 음식도 세계화가 되어 가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이제 중국음식에 적응한 것 같다’는 소소한 기쁨이 밀려왔다. 물론 이런 작은 기쁨은 다음날 아침부터 무안하게 잊혀지고 말았지만.



점심을 먹고 왕부정 거리를 지나, 류리창 거리로 향했다. 강수량이 적은 베이징의 시목(市木)이측백이라는 것과 16,400㎢에 1920만 명이 사는 거대 도시라는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마음은 류리창 거리로 내달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청나라 건륭제 당시 27만칸이나 되는 세계의 보물창고, 류리창! 연암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했던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 청나라 초기 상업이 날로 번창하여(가이드 말에 따르면 봉급이 따로 없던 내시들이 하사품 또는 몰래 훔친 궁궐의 물품을 팔아 더욱 번창했다고 한다) 쓸쓸했던 성문 밖 유리공장 일대가 점차 번성하여 고서적, 골동품, 탁본한 글자와 그림, 문방사우 등을 중개 판매하는 특색있는 상점거리가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상인·관리·학자·서생 등이 끊이지 않는 문화의 거리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연암에 앞서 홍대용이나 박제가 등이 다녀가며 이곳에서 우정의 네트워크를 싹틔웠다고 했던 그곳이다.



몇 분 주어지지 않은 시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류리창에 대한 첫인상은 ‘초라함’이었다. 옛 명성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은 차치하고라도 낡고 먼지가 앉은 고루함은 물론 중국 시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상업화된 가게들은 실망스러움보다 어딘지 모를 슬픈 느낌이 앞섰다. 또한 여기서 파는 물품의 101%가 가짜라는데, 그렇기 때문에 신비함보다는 상술이 더 눈에 띄어 호기심은 계속 줄어들 뿐이었다. 독특한 향에 이끌리어 들어간 티벳 관련 상점에서는 쭈뼛거리는 중국말을 몇 마디 더듬다 나오고 말았다. 연암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필담을 나누었을 텐데. 어찌해서 나는 ‘두어 샤우첸(얼마에요?)’이라는 말만 입가에 맴도는지. 그렇게 터벅터벅 걷다 만난 어느 가게 앞의 여치 소리만(작은 새장 속에 울고 있었다)이 그 옛날의 흥성스러움을 홀로 전하는 듯 했다.



점점 뜨거워지는 베이징의 햇빛을 피해 다시 차에 올랐다. 다음 일정은 베이징의 중심 천안문과 정양문 아래(남쪽) 대책란 시장. 중국말로 ‘다자란’시장. 명나라에 형성되어 청나라에 번성을 누린 옛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시장. 대다수의 점포가 명청(明淸) 시기 이후의 전통적 지명과 저잣거리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천안문이 가까워 혹시라도 천안문을 둘러볼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무척 넉넉하게 주었다. 차가 다니지 않아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았지만(간혹 전철이 다니지만 여행객을 위한 전시운행이었다) 베이징의 뜨거운 태양은 걸음을 무척 더디게 했다. 시장 입구에는 스타벅스 등 서구화된 상점들이 많았고,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베이징 카오야(오리) 요리로 유명한 ‘전취덕’이라는 가게 입구도 지나쳤다. 시장 내부로 들어서면 현대화된 중국 상점들이 많았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천 원 샵’같은 ‘10위엔(元) 점포’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문구류, 장난감, 의류, 신발, 사탕 및 과자류 등을 진열하고 손님을 끌고 있었다. 극장도 있었고, 청심환 상점과 차를 파는 가게들도 꽤 규모가 있어 보였다. <열하일기>를 살펴보면 조선 청심환은 믿을만하다 하여 연암과 약간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청심환을 요구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 청심환이 어떻게 대접받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사실 청심환 가게보다는 아들을 위해 선물을 사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일곱 살 난 아들이 중국 여행을 포기하면서(‘고행’모임을 시작하면서 모임마다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중국 여행을 함께 하자고 꼬드겼다. 하지만 유례없는 폭염에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우리 부부는 8월 초에는 아들의 중국 여행을 다양한 설득 작업을 통해 포기시켰다) 조건으로 내 건 중국 팬더곰을 어디서든 꼭 사야했기 때문이다. 중간에 들른 10위엔 점포에서 중국 의상을 입은 팬더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점원은 30위엔을 불렀다. 중국에서 흥정은 무조건 반값부터 부르라 하기에 15위엔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성질이 급한 남편은 다른 가게에서 살 수 있을 거라 하면서 재촉을 했다. 사실 여행 초반이기에 급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굳이 흥정을 오래 끌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재촉하는 남편 앞에 점원이 더 다급해져 결국은 20위엔으로 흥정을 끝냈다.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푸른 색 중국 의상을 입은 팬더곰을 들고 나섰다.



대책란 시장에서 목표는 달성했으니 새로운 도전 의욕이 솟구쳤다. 그다지 멀지 않다는 천안문 광장으로 가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우리 부부만 남게 되었고 홀가분하게 정양문을 지나 지하도를 건너 모택동 주석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는 모택동 기념관 앞에 다다랐다. 불행히도 오전에만 개관하기에 내부를 둘러볼 수 없었다. 그리고 오른 쪽 모퉁이를 돌아 천안문 광장을 찾아 나섰다. 특별히 이곳이 천안문 광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찾아 나섰지만 삼엄한 경비를 보고 분명 천안문으로 가는 길목임을 직감했다. 정양문 지나 지하도를 건너면서 가지고 있는 소지품들을 마치 공항에서처럼 카메라 투시하는 것이나, 천안문 길목에서 중국의 인민경찰 공안이 라이터 하나까지도 꼼꼼하게 수색하는 것을 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이 ‘가장 열린’ 광장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중국말로 텐안먼. 중앙에는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으로는 모주석 기념당, 정양문(正陽門)(전문, 前門)이 설치되었고, 광장의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전국인민대표대회 의사당), 동쪽에는 중국국가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천안문 북쪽으로는 자금성과 맞닿아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광장은 그야말로 열기의 도가니였다. 이렇게 더운데도 외국인보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았고, 곳곳에서 사진 찍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중국의 중심이라고 할만한 그곳에는 그저 여름의 태양만이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1989년 그 열기는 사그러들고 물리적인 더위만이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그네들은,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찍는 걸까? 과거, 현재, 아니면 미래?


그곳에서 김수현 선생님과 윤민광 선생님을 만났고, 김수현 샘이 생수를 사주셨다. 약간 비릿했지만 시원함은 정말 최고였다.(김수현 선생님, 고마워요~)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대책란 시장 입구에서 일생을 만났다.



그리고 다시 이동.


다음 여정은 왕부정 거리! 중국말로 ‘왕푸징(王府井)’은 일찍이 명나라 시대, 여기에 왕부(왕족 저택)의 우물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외국인 유치를 위해 전략적으로 거리를 조성했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명동과 흡사하다고 했다. 왕부정 거리는 대책란 시장보다 더 활기에 넘쳤다. 류리창이 중국의 과거를, 대책란이 현재를 나타낸다면 왕부정 거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익숙한 삼성이나 롯데백화점도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중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왕부정 서점’이 있었다.



왕부정 거리를 탐색하기에 앞서 중국의 서구 문명의 시작점인 천주교 성당을 먼저 들렀다. 중세 고딕풍의 아름다운 건물 외양보다 시원한 그늘 아래 쉬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베이징에는 여기 왕부정에 있는 동당을 비롯해 자금성을 중심으로 북, 서, 남쪽에 모두 네 개의 성당이 명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연암도 이 성당을 보고 야소교에 대한 생각을 펼쳐 나간다. 교당 앞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웨딩포토가 한참이었고, 우리도 웨딩포토를 찍는 것처럼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정면이 아닌 측면에 난 문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미사를 지켜보았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성당에서 다시 왕부정 거리에 들어섰다.


쇼핑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서점에 들러보기로 했다. 왕부정 서점은 7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 층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어디든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이 우리나라 서점의 풍경과 다를 바 없어서 정겹기도 했다. 특히 외국소설 진열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수십 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혹시나 우리나라 소설이나 작품이 진열되어 있을까봐 여러 차례 돌아봤지만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1층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이 잘 보이는 곳에 진열돼 있었다고 한다.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서점은 매 층마다 주제가 다른 책들로 채워져 있었고, 7층에서는 가전제품이나 문방구를 팔고 있었다. 책갈피와 중국 학생들이 사용하는 공책 몇 권을 사들고 서점을 나섰다. 나중에 범혜영 선생에게 서점에서 ‘I'Q84 책을 봤다고 했더니 충격을 먹은 얼굴로 ‘언니가 이럴 줄 몰랐어요’한다. 선배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지금에서야 고백한다. 범 선생, 난 하이타니 겐지로나 에토 모리, 시모무라 고진 책은 좀 읽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오. 하하.^^*



집결 시간보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 그 유명하다는 꼬치의 거리를 찾아보았다. ‘올림푸스’라는 거대한 간판이 걸린 건물 뒤에 빽빽하게 상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흥성스러운 점원들의 사람 끄는 소리,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와 독특한 향은 진짜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안내받은 대로 그곳에는 사탕, 과일, 개구리, 오징어, 양고기, 전갈, 불가사리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꼬치들이 즐비하였다. 자그마한 전갈들이 꿈틀거리며 열댓 마리 엮여 있는 꼬치를 보며 군침이 아닌 마른침이 삼켜졌다. 역시 큰 나라는 먹는 것도 스케일이 크다는 생각을 했다. 꼬치의 거리를 나와 어떤 건물 계단참에 앉아 일행을 기다리는데, 몹시 역한 냄새가 나 주위를 둘러보니 작고 네모난 어떤 것을 꿴 꼬치를 맛있게 먹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냄새. 냄새를 피해 일행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장님께 그 작고 네모난 꼬치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발효한 두부를 튀긴 꼬치라 한다. 우리나라 청국장이나 삭힌 홍어와 비슷하다는 이야긴데, 아무리 바꿔 생각해도 도저히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독특한 향’으로 기억되는 나라 중국이다.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드디어 고미숙 선생님이 계신 2팀과 합류한다. 그 동안 베이징을 함께 주유했던 우리 1팀은 나를 포함한 광주 선생님 12명을 더하여 총 28명이다. 거기에 1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고미숙 선생님을 포함한 31명의 참가자가 더해져 59명이 4박 5일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된다. 사실 패키지라는 것이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서 함께 여행하는 것이지만, 썩 마음에 드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여행 전에 참가자가 60명 가량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대로 공부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소중한 만남이고 인연인지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의미 있고 유쾌하게 보냈다. 그리고 ‘여행’은 ‘구경’이 아닌 ‘만남’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여행 중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된 분들의 이야기는 빠트리지 않고 이 글에 남길 예정이다.


일단 점심시간에 함께 자리에 앉게 된 수원에서 온 용감한 삼형제. 경래, 홍래, 성래. 중학교 2학년부터 초4까지 2년 터울로 여느 삼 형제라면 시끌벅적 다투기에 바쁘지만 의젓하고 점잖다. 놀라운 점은 부모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 사장님 사모님과 친분이 있어 여행에 참여한 것이라지만 아들 셋을 외국으로 보낸 부모님이나, 부모님 없이 비행기 타고 떠나온 아이들이나 참 놀랍고 대단해 보였다. 삼 형제는 가는 곳마다 귀엽고 과감한 쇼핑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렇게 쇼핑한 고깔 모자를 셋이 쓰고 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워낙에 이동 거리가 많은 탓에 이튿날 약간의 탈진 상태를 보인 나에게 초콜릿을 건네 준 경래, 홍래, 성래야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고미숙 선생님을 비롯한 2팀과의 합류로 저녁시간에는 더욱 활기가 넘쳤다. 안타깝게도 2팀은 비행기가 연착되어 류리창 등 예정했던 여행지를 다 들러 보지 못해 조금은 지쳐 보였다. 10명 기준의 원형탁자이기에 우리 부부는 대부분 다른 분들과 합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 저녁도 그렇게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는 영욱군, 선정?양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 영욱 군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번 여행도 배움의 과정이라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일종의 기사로 싣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여행에 대해 자세히 질문하고 대답하며, 음식을 먼저 먹어보고 건네기도 하며 식사를 마쳤다. 대학을 가지 않고 군대를 다녀왔으며 수유너머 공간에서 진짜 배움을 일궈가는 영욱 군과 배움의 도반 선정 양! 그들의 젊음과 도전, 배움의 자세가 부럽고 감탄스러웠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이다 보니, 함께 여행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흥분으로 4일의 여정이 기다려졌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이동했다. 베이징이 아닌 열하(승덕)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려영이라는 옛 조선족들의 터전이었던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했다. 피곤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은(상하이에 비해) 거리를 차창으로 흘려보내며 하루 여행을 정리하고 있는 중 가이드에 이어 사장님이 일어나 말문을 여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1시간가량의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 앞서 밝혔지만 어투는 분명 경청을 이끌어내기에 힘들었지만, 내용은 무척 신선했다. 10년 이상 중국에 체류하며 얻은 삶의 지식과 공부의 흔적이 잘 녹아들어 있었다. 시작은 중국에 남아 있는 조선인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사군에서 신라방, 고려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언어도 동화돼 버려 흔적도 없지만 성씨만 남아있는 요녕성 ‘박씨 마을’ 이야기, 중국에는 없지만 조선에 남아 있는 중국 성씨 ‘명씨’ 이야기.


그리고 1850년 청나라 말기, 조선의 대기근으로 시작된 조선인 이주의 역사. 특히 경술국치 이후 조선인 이주는 급격한 물살을 타고 단동, 간도, 연길, 용정, 도문, 흑룡강 등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중국 속에 남아 삶을 이어가던 당시 조선인의 영향력은 광동성 광주 꼬뮌에서 희생된 조선인이 150이라는 사실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아리랑의 김산과 양세봉, 이운광, 이충렬 등 이름 모를 독립운동가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해방 후 귀향이냐 정착이냐를 두고 고민할 때 조선 출신 주덕해라는 걸출한 인물로 인해 최초의 조선족중학교가 건립되고, 연변조선족 자치주를 성립하고, 연변대학, 연변가무단으로 교육과 문화의 기틀을 다져지기까지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역사가 차근차근 정리되었다. 하지만 현재 자치주에는 조선족들이 상하이나 베이징으로 흩어져 40%도 남지 않아 자치주 유지도 힘들어지고 있다 하였다. 이렇게 한사군, 신라방, 고려영, 조선족 자치구로 이어지는 중국 속 조선인 이야기에서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살고 있는 100만 명 이상의 한국인, 이른 바 ‘신선족’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리고 현재 중국과의 외교관계까지 보충해 주신다. 현재 한국의 중국 수출 비중은 해외수출 전체 27%로 미국의 3배, 일본의 6배가량 된다고 한다. 그런데 5년 후에는 50%가 넘을 거라고 하며 점점 커지는 한국의 대중의존도에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특히나 위기에 취약한 한국이 아니던가? 병자호란 때는 5일 만에, 임진왜란 때는 15일 만에 수도가 함락된 역사가 있는 한국은 현재 대중외교에서 아무런 실리를 취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천안함 사태로 인해 더욱 더 막혀만 가고……. 그렇게 끝이 없을 것 같은 사장님의 이야기는 고려영온천호텔에 차가 정차하면서 막을 내렸다.



9시 넘어 도착한 고려영은 어둠이 아니라 해도 조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중국의 평범한 작은 마을이었다. 호텔은 구석구석 낡고 부실한 흔적이 많았다. 첫날을 그냥 보낼 수 없어 호텔 안에 있는 주점에 모여 5위엔 짜리 연경맥주를 마셨다. 모임 회원이 아니어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윤민광, 문수미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일행 중 도진순 교수님, 사장님과 몇 분이 술을 마시고 계셨고, 사장님이 오셔서 닭발이며 맥주, 배갈을 보충해 주셨다. 거기서 배갈, 맥주 폭탄주를 맛있게 먹는 법도 배웠지만, 도저히 닭발만은 도전할 수 없었다.


1시 넘어서야 남은 닭발과 배갈을 챙겨 다음 일정을 위해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호텔은 낡고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지만, 잠은 푹 잘 수 있었다.



3. 2010, 고북구를 나서며



산을 따라서 성을 쌓았는데, 깍아지른 듯한 골짝은 깊은 계곡은 아가 리를 벌린 듯이 둘러 꺼져서 흐르는 물이 부딪쳐 뚫고 본즉 성을 쌓을 수도 없어 이런 데는 정장(亭鄣)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홍무 연간에 수어천호를 두어 오중관을 지키게 하였다. 내가 무령산을 돌아서 배로 광형하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 나갈 때는 밤이 벌써 삼경이나 되었다. 겹으로 된 관문을 아놔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는 높이를 재어 보니 여남은 길은 되었다. 필연을 끱어 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벽을 어루만지며,


“건륭 45년 경자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 박지원 이곳을 지나다”


(열하일기 中 ‘산장잡기’ 중 446쪽 -보리출판사-)



8월 13일 금요일.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8시 정도에 길을 나선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열하 기행 시작이다. 장성 밖,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길에 계곡이 많고, 지세가 험해서 거의 무박 4일의 강행군을 해야했던 사신단의 고달픈 여정이 <열하일기> ‘막북행정록’(여기서 ‘막(漠)’이란 사막을 뜻하고, ‘막북’은 사막의 북쪽을 일컫는다)에 실감나게 펼쳐진다. 오죽하면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며 ‘일야구도하기’같은 명문장을 남겼을까?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겨 밀운에서 승덕(열하)까지 3~4시간 정도로 단축되어 차로 시원하게 달린다. 창대까지 버리고 가야 했던 연암의 처지를 머릿속으로만 그려보지만, 베이징과 사뭇 달라진 풍경에 더 눈길이 간다. 베이징에 없던 푸른 산들이 나타나고, 산이 있기에 물도 많다. 그래서 밀운(미윈)에는 댐이 있어, 베이징 시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한다고 한다.



차 안에서는 풍성한 배움의 향연이 펼쳐졌다. 창원대에서 현대사학을 가르치고 계신 백범 연구의 권위자이신 도진순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으신 것이다. MBC ‘느낌표! -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되기도 했던 <백범일지>를 주해하여 돌베개 출판사에서 책을 펴내신 한국 현대 사학의 거목이 우리 여행에 동행하신 것이다. 이번 여행이 연암의 <열하일기>와 고미숙 선생님으로 인해 씨실과 날실로 엮이었다면, 도진순 교수님으로 인해 틈새를 촘촘하게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조창완 사장님은 물론. 여행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옌산 산맥을 따라 중국 대륙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별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별을 보며 이동했던 유목민족의 실크로드부터, 고분에 새겨진 별의 이야기와 하늘을 보러간다는 의미의 명나라 조공 사신의 ‘조천’이 청나라에서는 ‘연행’으로 바뀐 사정으로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또한 연암이 천체에 대해 지식이 매우 과학적이었음도 하늘을 많이 바라다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씀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초원에서는 경치가 훌륭하지 않아 오히려 하늘을 보며 명상하기 좋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다음으로 베이징이 왜 수도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지리, 역사학적으로 풀어주셨다. ‘서안’이 서역과 문화교류의 중심이었다면, ‘북경’은 농경사회와 북방유목사회를 조율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유에서 선택된 수도였다는 것. 우리가 목적지로 삼은 ‘열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황제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한 휴식처이지만, 장성 밖 오랑캐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안보와 고급 외교 정치의 숨은 수도라는 것도 설명해 주셨다.


창밖으로 장성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장성 이야기로 넘어갔다. 진․한나라부터 시작해서 명나라까지 증개축이 이어져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오랑캐를 막고자 세웠기 때문에 오랑캐가 다스린 왕조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한족 왕조 집권 시(당나라 제외)에만 증축이 이뤄졌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제 때에 장성 보수에 대한 건의가 있었지만, 과거의 어떤 정권도 장성 밖 외적에게 위협받아 멸망한 적은 없다며, 명나라 오삼계를 예로 들며 내부의 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장성개축 의견을 물리친다. 대신 장성 밖 열하를 여름 피서지로 삼아 평소에는 사냥터로, 안보와 외교의 요충지로 이용한다. 그렇게 다져진 국방의 힘으로 강희 61년, 옹정13년, 건륭60년 동안 청나라 문화의 화려한 꽃을 피운다.



도 교수님의 강의가 무르익을 무렵 10시 정도에 고북구 터널을 지나쳤다. 연암은 낮은 산줄기를 올라 한밤중에 고북구를 지났지만, 우리 일행은 오전에 장성 아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연암집>을 엮은 김택영이 ‘오천 년 이래 조선 최고의 명문’이라고 찬탄한 ‘야출고북구기’를 탄생시킨 곳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터널로 지나야 한다니 너무 아쉽기만 했다. 터널을 지나 고북구 기념비에서 잠시 연암의 자취를 찾았다. 고미숙 선생님의 짧은 강연이 있었고,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사실 ‘야출고북구기’가 명문장이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지만, 짧은 안목에 어떻게 감히 평을 할 수 있을까? 다만 삼경에 지나가며, 피로와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형세와 고북구에 얽히 역사적 사실을 더듬고, 또 그 아래 쓸쓸히 버려진 전쟁의 원혼들을 떠올린 연암의 감성과 체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술로 먹을 가는 낭만까지도.



다시 차에 올라, 금산령을 향해 달렸다. 금산령 장성에 11시 못 되어 도착했다. 대개 만리장성을 보려 팔달령을 많이 찾는다지만, 너무 상업화, 현대화 되어서 장성이 지닌 맛을 제대로 맛 볼 수 없다 한다. 그래서 옛 자취가 많이 남아있는 금산령을 찾았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높은 산등성이에 물결치듯 장엄하게 솟아 있었다. 10여분 줄을 선 후 유리창이 깨지고 뭔가 엉성한 케이블카를 15분 정도 타고 능선에 도달했다. 케이블카에 내려서도 5분여를 걸어서야 장성에 도달했다. 한국 관광객은 우리 일행뿐이고, 내국인 관광객과 외국인들이 간혹 보였다.


성벽은 웅장하며, 견고했고, 아름다웠다. 급하게 경사진 계단을 올라 장성에서 굽어본 중국 대륙은 말 그대로 광활했다. 장성 위에도 길이 있어 5~6사람은 손을 잡고 지나가도 될 만큼 폭이 넓었다. 실제 이동이 용이해 말 다섯 마리, 사람 10명이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첫 번째 돈대부터 보수가 안 돼 허물어진 돈대까지 열심히 걷고 사진기를 눌러댔다. 누군가 장성을 누비는 트레킹도 괜찮겠다고 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곳곳이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간혹 귀퉁이 진 곳은 소변이나 대변으로 악취가 심하기도 했다. 장성 위에는 마을 주민들이 화보를 팔고 있었는데,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장사를 할 의지가 그다지 없는지 사진을 찍어주며 연방 생글거린다. 분명 케이블카로 내려다본 작은 마을이 생활의 터전이리라.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며 이인호 선생님과 따님인 두루양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연극모임을 통해 범혜영 선생의 소개로 딸과 함께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모님도 선생님이고, 광주에 몇 번 강의를 나가신 적이 있다고 하여 다시 여쭤보니, 바로 박경이 선생님의 남편 되시는 분이었다. 작년 봄 ‘열정’과 ‘생각’, ‘긍정적 체념’으로 기억되는 멋진 강의를 해 주신 선생님이 떠올라 너무도 반가웠다. 따님과 티격태격 하는 모습이 무척 정겹고 따뜻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행에 가족들이 많다. 초등학교 6학년인 동제와 엔지니어이신 아버님, 고등학생 용원이와 한솔교육 팀장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되시는 정태헌 교수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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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님의 댓글

강현 작성일

여행기의 절반 정도만 탑재가 돼 있어서요. 나머지 부분까지 읽고 싶으신 분은, 다음 링크를 눌러주세요.
http://danpung.tistory.com/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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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완님의 댓글

조창완 작성일

  맞습니다. 강현선생님이 알려주신 블로그로 가시면 사진까지 볼 수 있답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그곳에서 놀라운 여행기를 감상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