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균의 늦바람 중국여행 -대안탑(大雁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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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013회 작성일 08-05-30 17:03본문
3. 대안탑(大雁塔)
지난번에는 섬서성 역사 박물관 이야기를 했죠?
섬서 역사박물관을 나온 시간은 대충 1시쯤. 다음 목표는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 온 불경을 번역했다는 대안탑(大雁塔)이었습니다. 탑 속에 들어 앉아 번역한 게 아니고 번역한 곳이 대자은사라는 절이었고 그 절이 전란 통에 무너지면서 탑만 남았는데 그게 대안탑이지요. 우리말로 하면 큰 기러기 탑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장법사가 인도에 갈 때 사막에서 길을 잃어 버렸는데 어디선가 기러기가 날아 와서 길을 인도해줬답니다. 그래서 중국에 돌아와서 인도식 탑을 짓고 안탑(雁塔)이라고 한 건데 그 뒤에 의정이라는 스님이 또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 와서는 서안 중심부에 비슷한 탑을 하나 더 지었거든요. 그래서 이 절에 있는 탑을 대안탑(중국말로는 따엔타), 의정이 지은 탑은 소안탑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튼, 박물관에서 대안탑은 걸어서 10분정도, 관광안내 책자를 미리 봐서 알지만 어느 방향인지 모르잖아요. 중국어도 연습할 겸 아무나 붙들고 물어 보는 거죠 뭐. 이럴 땐 할머니나 중년 아줌마들이 제일 잘 가르쳐 줍니다. 대충 "`아! 대안탑이요? 저리 쭉 가다가 오른 쪽으로 꺾으면 나와요." " 아주 가까워요." 그런데 한 가지 중국에서 <가깝다><금방이다>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중국말로 금방은 마샹 (馬上) 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 마샹은 대체로 500미터에서 1Km까지를 말해죠. 그러니 50미터 이내를 금방으로 생각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항상 헷갈리는 겁니다.(아니 왜 안 보이는 거야? 이 자식이 속였나? 하면서 말입니다). 이럴 땐 가다가 또 한 번 붙잡고 물어 보면서 확인 사살하면 됩니다. 어쨌든 길을 건너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 나오고 대안탑이 멀리 보이더군요.
시간은 1시 반, 점심을 해결해야죠. 중국에서 피자나 햄버거를 먹기는 싫으니까 대충 둘러보다가 앗! 저거다! 눈에 들어 온 간판은 서안 가대권탕포자집. 가씨네 만두집이란 얘기죠.(체인점입니다) 이 집 맛있었어요(하긴 제가 맛있지 않은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양고기 만두(정확히는 포자라고 하죠. 만두 달라고 하면 속이 없는 찐빵 같은 걸 가져다 줘요. 우리가 잘 먹는 저팔계 귀 같은 만두는 교자라고 하고)와 깨장에 버무린 비빔국수(凉皮라고 합니다) 그리고 강희제가 즐겨 먹었다는 팔보죽(좀 답니다). 양고기 만두 속에는 고소한 육즙이 들어 있는데 조심해서 먹지 않으면 입천장 다 벗겨집니다.
신나게 먹고 15위안(2000원쯤 되는 거죠). 이래서 중국이 좋은 겁니다.(중국 식당 만세!) 그리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여행기 쓰는 거죠. 사실 관광도 노동이라서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리고 중국 관광지가 좀 크고 좀 넓습니까? 보통 한 군데에서 십리 정도를 걸어야 하니까 서 너 군데 들리면 녹초가 되요. 그래서 점심 먹고는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정도 이렇게 작은 노트에 여행기를 쓰면서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전에 본 걸 잊어 먹지 않고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어요. 그냥 다니면 나중에 집에 왔을 때 온통 뒤죽박죽이라 어디서 뭘 봤는지, 이 사진이 절인지 민속촌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리죠.
잘 먹고 잘 쓰고 나서는 가(賈)씨네 물만두 집을 나와 대안탑 쪽으로 가다가 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조금은 어벙하게 생긴 중국 남자 둘에게 부탁했죠. 혼자 다니면 다 좋은데 사진 찍을 때 좀 괴롭습니다. 하지만 "혼자 왔는데 한 장 찍어 주실래요? " 하면 다 찍어 줍니다(어디서나 보통사람들은 참 착해요) 처음엔 중국어로 '니 능부능..." 어쩌고 했지만 나중엔 그냥 우리말로 '혼자 왔는데요. 한 장 부탁합니다." 하는 게 더 낫더군요. 외국인인줄 알고 얼른 찍어 주니까요( 중국어로 하니까 좀 덜 떨어진 놈처럼 보는 시선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아무튼 남경 중산릉에서 화장실이 급해 그냥 지나친 녀석 하나 빼고는 사진 찍어달라고 할 때 거절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고맙습니다) 이게 그 사진이에요.
뒤에 보이는 게 대안탑. 입구가 반대쪽이라 좀 걸었습니다. 담장을 따라 반 바퀴 돈 셈인데 그 담장 옆 광장에 당나라 때 사람들 모습을 청동으로 조각해 놓았더군요. 그 것도 높은 대에 올린 게 아니라 보도블록 위에 그냥 세워 놨는데 전 그게 더 좋더군요. 당나라 때의 씨름꾼, 악사, 엄마와 아이. 바둑 두는 사람들 바닥에는 당 현종 때 만든 돈 개원통보도 새겨져 있었고,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게 아쉽습니다. 5분 쯤 걸었나요? 입구에 도착해보니까 현장법사의 커다란 동상이 서 있더군요. 그래서 사진 찍고 가는데 그 동상 뒤 바닥에 웬 50대 부부 둘이 봇짐을 베게 삼아 사이좋게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수 십 명이 왔다 갔다 하는 광장에 떡하니 드러누워 자는 사람들이라니. 세속을 초월한 도인들인지 아니면 아무 개념이 없는 건지 아무튼 분명한 건 무척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이사진이이에요
청소 아줌마가 웃고 있는 게 보이죠? 잘 모르겠지만 이 두 노인네는 금슬이 좋은 게 분명했습니다. (멀리서 줌으로 당겨 찍었어요. 바짝 들이대면 실례라서) 보기 좋더군요.
대안탑은 648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일찍 사망한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명복을 빌고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慈母恩德)에서 절인 자은사(慈恩寺, 츠언쓰) 안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시절, 김유신이 신라군을 지휘, 펄펄 날면서 백제를 두들길 궁리를 하고 있던 때죠. 대안탑은 652년에 건립되었는데. 초기에는 5층이었고 재료는 연와(煉瓦), 석회, 흙으로 된 전탑입니다. 대안탑은 701년에 7층으로 재건하였고, 그 뒤 당 대종 때 10층으로 더 올렸는데 그 후 전쟁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7층만 남아 있죠. 중국정부에서 현재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왠지 고풍스런 느낌은 없습니다. 중국인들은 복원공사를 하면 무조건 시멘트나 콘크리트부터 갖다 부어 버리거든요. 우리 분황사탑과 비슷한 데 이런 탑은 인도 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겁니다. 인도의 산치 대탑과 비슷하죠. 누각을 올리는 중국식 탑은 당나라 이후 에 나타납니다. 입장료는 25위안. 탑을 중심으로 있는 수많은 전각과 건물들은 모두 현장법사를 위한 것으로 그의 생애, 불경 구하러 인도로 가는 여행길, 인도에서의 활동. 당나라로 돌아 올 때의 여정. 그리고 그를 반갑게 맞이한 당태종 이세민 등이 그려지고 새겨져 있어요.
손오공과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은 애석하게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현장 삼장원>이라고 해서 부처님 대신 현장법사를 모신 불전이 있는데 이 불전 안에 현장법사의 정수리 뼈가 모셔져 있습니다. 촬영금지죠. 크기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그런데 이 뼈를 일본인들이 중일 전쟁 때 약탈해 갔다가 나중에 전쟁 끝나고 반환했답니다. 그런데 반환할 때 보니까 그 뼈 크기가 작아져 있었다죠? 그래서 그 뼈 일부를 일본 놈들에게 30만 명이나 학살당한 남경 백성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남경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 남경에 모셔진 현장 정수리 뼈 일부를 남경에서 봤어요. 손문의 중산릉 옆에 있는 영곡사라는 조그만 절에 모셔져 있더군요. 역시 촬영금지. 하지만 가슴 뭉클했죠.`아! 여기 계셨군요. 서안에서도 뵈었습니다. 다시 뵈니 반갑군요.' 이런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는지 궁금하시죠?
입구에서 만난 대안탑 현장 가이드 <중국말로는 도유(導遊/따오요)라고 해요> 주정(朱靜)이라는 아가씨한테서 들은 겁니다. 대안탑 입구에 들어서니까도유 깃발과 함께 몇 사람이 서 있었어요. 현장안내 가이드들인데 중국어는 30위안, 영어는 60위안이었습니다. 어차피 제 여행목적 중 첫 번째가 중국어 현지 학습이었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 중국어로 합시다!" " 어느 나라 사람이세요?"" 한국 사람이요'" " 뭐요?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뭐 대충은..." 고개를 갸웃거리던 직원이 남자 가이드를 하나 소개해 줬는데 전 은근히 그 옆에 서있던 여자가이드가 맘에 있었거든요. 예쁘진 않았지만 단정하고 왠지 귀티 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그 사이에 중국 단체 관광객이 들어 온 거죠 결국 이 주정이라는 아가씨가 바턴 터치! 40분 정도 저를 안내하면서 중국어로 설명한 거죠. 그런데 이 아가씨가 물건이었습니다. 정말 해박했어요. 왜 대웅전에 들어 갈 때 옆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문지방을 밟으면 왜 안 되는 지부터 (부처님 모신 곳이니까 문지방이 부처님 어깨라 밟으면 안 되는 거래요. 여기서 아마 문지방 밟으면 재수 없다는 풍속이 생겨난 모양입니다. 중국에도 우리랑 비슷한 게 정말 많아요) 현장의 일생과 여정을 줄줄이 설명하는데 정말 열심이고 해박하더군요. 저도 대충은 알고 있는 내용들이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잘 못 알아듣겠으면 쓰라고 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아가씨 우리말도 조금 하고 쓸 줄도 알더군요. 어찌나 기특한지 우리말로 중을 <스님>이라고 하는데 이건 僧자와 님 자가 합쳐져 만들어 진 말이라는 등 나름대로 나도 우리 말 가르쳐 주고 등등 분위기 참 근사했어요. 안휘성 황산에서 온 주정이라는 아가씨. 혼자 다니다 보면 너절한 식당이나 거리에서 우연히 이처럼 난초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중국 아가씨들을 가끔 보게 되는 데 이럴 땐 기쁨 두 배죠.(다음 날 저녁 먹으러 갔던 허름한 식당에서도 이런 난초를 하나 만났어요) 아무튼 대충 지어낸 얘기로 얼버무리기 일쑤인 일부 조선족 가이드들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현장의 정수리 뼈 얘기도 이 아가씨 설명이 없었으면 그냥 바라만 봤을 겁니다. 남경에서 나머지 뼈를 봤을 때의 감동도 없었을 테죠. 사진 한 장 같이 안 찍었던 게 아쉬웠습니다. 이 아가씨 왈 "한국 사람들 가이드를 하고 싶은데 조선족가이드들이 전부 독차지하고 있어요." 한국인을 가이드하고 싶어 하는 중국 가이드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죠. 아무튼 우수했어요.( 첫날 이 우수한 가이드를 만나는 바람에 다음 행선지마다 중국가이드들을 불러 중국어 공부 겸 안내를 받았는데 그러다 병마용에서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중국가이드라고 다 우수한 건 아니었어요. 평균적으로 조선족 가이드보다 해박한 건 사실이지만).
대안탑의 인터넷 주소는 www.daciensi.com 건물들이 크고 높아서 그 안에서는 사진이 잘 안나옵니다. 다음엔 중국 최초의 이슬람 사원 청진사에 대해 말씀드리죠.
지난번에는 섬서성 역사 박물관 이야기를 했죠?
섬서 역사박물관을 나온 시간은 대충 1시쯤. 다음 목표는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 온 불경을 번역했다는 대안탑(大雁塔)이었습니다. 탑 속에 들어 앉아 번역한 게 아니고 번역한 곳이 대자은사라는 절이었고 그 절이 전란 통에 무너지면서 탑만 남았는데 그게 대안탑이지요. 우리말로 하면 큰 기러기 탑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장법사가 인도에 갈 때 사막에서 길을 잃어 버렸는데 어디선가 기러기가 날아 와서 길을 인도해줬답니다. 그래서 중국에 돌아와서 인도식 탑을 짓고 안탑(雁塔)이라고 한 건데 그 뒤에 의정이라는 스님이 또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 와서는 서안 중심부에 비슷한 탑을 하나 더 지었거든요. 그래서 이 절에 있는 탑을 대안탑(중국말로는 따엔타), 의정이 지은 탑은 소안탑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튼, 박물관에서 대안탑은 걸어서 10분정도, 관광안내 책자를 미리 봐서 알지만 어느 방향인지 모르잖아요. 중국어도 연습할 겸 아무나 붙들고 물어 보는 거죠 뭐. 이럴 땐 할머니나 중년 아줌마들이 제일 잘 가르쳐 줍니다. 대충 "`아! 대안탑이요? 저리 쭉 가다가 오른 쪽으로 꺾으면 나와요." " 아주 가까워요." 그런데 한 가지 중국에서 <가깝다><금방이다>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중국말로 금방은 마샹 (馬上) 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 마샹은 대체로 500미터에서 1Km까지를 말해죠. 그러니 50미터 이내를 금방으로 생각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항상 헷갈리는 겁니다.(아니 왜 안 보이는 거야? 이 자식이 속였나? 하면서 말입니다). 이럴 땐 가다가 또 한 번 붙잡고 물어 보면서 확인 사살하면 됩니다. 어쨌든 길을 건너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 나오고 대안탑이 멀리 보이더군요.
시간은 1시 반, 점심을 해결해야죠. 중국에서 피자나 햄버거를 먹기는 싫으니까 대충 둘러보다가 앗! 저거다! 눈에 들어 온 간판은 서안 가대권탕포자집. 가씨네 만두집이란 얘기죠.(체인점입니다) 이 집 맛있었어요(하긴 제가 맛있지 않은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양고기 만두(정확히는 포자라고 하죠. 만두 달라고 하면 속이 없는 찐빵 같은 걸 가져다 줘요. 우리가 잘 먹는 저팔계 귀 같은 만두는 교자라고 하고)와 깨장에 버무린 비빔국수(凉皮라고 합니다) 그리고 강희제가 즐겨 먹었다는 팔보죽(좀 답니다). 양고기 만두 속에는 고소한 육즙이 들어 있는데 조심해서 먹지 않으면 입천장 다 벗겨집니다.
신나게 먹고 15위안(2000원쯤 되는 거죠). 이래서 중국이 좋은 겁니다.(중국 식당 만세!) 그리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여행기 쓰는 거죠. 사실 관광도 노동이라서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리고 중국 관광지가 좀 크고 좀 넓습니까? 보통 한 군데에서 십리 정도를 걸어야 하니까 서 너 군데 들리면 녹초가 되요. 그래서 점심 먹고는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정도 이렇게 작은 노트에 여행기를 쓰면서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전에 본 걸 잊어 먹지 않고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어요. 그냥 다니면 나중에 집에 왔을 때 온통 뒤죽박죽이라 어디서 뭘 봤는지, 이 사진이 절인지 민속촌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리죠.
잘 먹고 잘 쓰고 나서는 가(賈)씨네 물만두 집을 나와 대안탑 쪽으로 가다가 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조금은 어벙하게 생긴 중국 남자 둘에게 부탁했죠. 혼자 다니면 다 좋은데 사진 찍을 때 좀 괴롭습니다. 하지만 "혼자 왔는데 한 장 찍어 주실래요? " 하면 다 찍어 줍니다(어디서나 보통사람들은 참 착해요) 처음엔 중국어로 '니 능부능..." 어쩌고 했지만 나중엔 그냥 우리말로 '혼자 왔는데요. 한 장 부탁합니다." 하는 게 더 낫더군요. 외국인인줄 알고 얼른 찍어 주니까요( 중국어로 하니까 좀 덜 떨어진 놈처럼 보는 시선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아무튼 남경 중산릉에서 화장실이 급해 그냥 지나친 녀석 하나 빼고는 사진 찍어달라고 할 때 거절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고맙습니다) 이게 그 사진이에요.
뒤에 보이는 게 대안탑. 입구가 반대쪽이라 좀 걸었습니다. 담장을 따라 반 바퀴 돈 셈인데 그 담장 옆 광장에 당나라 때 사람들 모습을 청동으로 조각해 놓았더군요. 그 것도 높은 대에 올린 게 아니라 보도블록 위에 그냥 세워 놨는데 전 그게 더 좋더군요. 당나라 때의 씨름꾼, 악사, 엄마와 아이. 바둑 두는 사람들 바닥에는 당 현종 때 만든 돈 개원통보도 새겨져 있었고,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게 아쉽습니다. 5분 쯤 걸었나요? 입구에 도착해보니까 현장법사의 커다란 동상이 서 있더군요. 그래서 사진 찍고 가는데 그 동상 뒤 바닥에 웬 50대 부부 둘이 봇짐을 베게 삼아 사이좋게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수 십 명이 왔다 갔다 하는 광장에 떡하니 드러누워 자는 사람들이라니. 세속을 초월한 도인들인지 아니면 아무 개념이 없는 건지 아무튼 분명한 건 무척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이사진이이에요
청소 아줌마가 웃고 있는 게 보이죠? 잘 모르겠지만 이 두 노인네는 금슬이 좋은 게 분명했습니다. (멀리서 줌으로 당겨 찍었어요. 바짝 들이대면 실례라서) 보기 좋더군요.
대안탑은 648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일찍 사망한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명복을 빌고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慈母恩德)에서 절인 자은사(慈恩寺, 츠언쓰) 안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시절, 김유신이 신라군을 지휘, 펄펄 날면서 백제를 두들길 궁리를 하고 있던 때죠. 대안탑은 652년에 건립되었는데. 초기에는 5층이었고 재료는 연와(煉瓦), 석회, 흙으로 된 전탑입니다. 대안탑은 701년에 7층으로 재건하였고, 그 뒤 당 대종 때 10층으로 더 올렸는데 그 후 전쟁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7층만 남아 있죠. 중국정부에서 현재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왠지 고풍스런 느낌은 없습니다. 중국인들은 복원공사를 하면 무조건 시멘트나 콘크리트부터 갖다 부어 버리거든요. 우리 분황사탑과 비슷한 데 이런 탑은 인도 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겁니다. 인도의 산치 대탑과 비슷하죠. 누각을 올리는 중국식 탑은 당나라 이후 에 나타납니다. 입장료는 25위안. 탑을 중심으로 있는 수많은 전각과 건물들은 모두 현장법사를 위한 것으로 그의 생애, 불경 구하러 인도로 가는 여행길, 인도에서의 활동. 당나라로 돌아 올 때의 여정. 그리고 그를 반갑게 맞이한 당태종 이세민 등이 그려지고 새겨져 있어요.
손오공과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은 애석하게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현장 삼장원>이라고 해서 부처님 대신 현장법사를 모신 불전이 있는데 이 불전 안에 현장법사의 정수리 뼈가 모셔져 있습니다. 촬영금지죠. 크기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그런데 이 뼈를 일본인들이 중일 전쟁 때 약탈해 갔다가 나중에 전쟁 끝나고 반환했답니다. 그런데 반환할 때 보니까 그 뼈 크기가 작아져 있었다죠? 그래서 그 뼈 일부를 일본 놈들에게 30만 명이나 학살당한 남경 백성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남경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 남경에 모셔진 현장 정수리 뼈 일부를 남경에서 봤어요. 손문의 중산릉 옆에 있는 영곡사라는 조그만 절에 모셔져 있더군요. 역시 촬영금지. 하지만 가슴 뭉클했죠.`아! 여기 계셨군요. 서안에서도 뵈었습니다. 다시 뵈니 반갑군요.' 이런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는지 궁금하시죠?
입구에서 만난 대안탑 현장 가이드 <중국말로는 도유(導遊/따오요)라고 해요> 주정(朱靜)이라는 아가씨한테서 들은 겁니다. 대안탑 입구에 들어서니까도유 깃발과 함께 몇 사람이 서 있었어요. 현장안내 가이드들인데 중국어는 30위안, 영어는 60위안이었습니다. 어차피 제 여행목적 중 첫 번째가 중국어 현지 학습이었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 중국어로 합시다!" " 어느 나라 사람이세요?"" 한국 사람이요'" " 뭐요?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뭐 대충은..." 고개를 갸웃거리던 직원이 남자 가이드를 하나 소개해 줬는데 전 은근히 그 옆에 서있던 여자가이드가 맘에 있었거든요. 예쁘진 않았지만 단정하고 왠지 귀티 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그 사이에 중국 단체 관광객이 들어 온 거죠 결국 이 주정이라는 아가씨가 바턴 터치! 40분 정도 저를 안내하면서 중국어로 설명한 거죠. 그런데 이 아가씨가 물건이었습니다. 정말 해박했어요. 왜 대웅전에 들어 갈 때 옆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문지방을 밟으면 왜 안 되는 지부터 (부처님 모신 곳이니까 문지방이 부처님 어깨라 밟으면 안 되는 거래요. 여기서 아마 문지방 밟으면 재수 없다는 풍속이 생겨난 모양입니다. 중국에도 우리랑 비슷한 게 정말 많아요) 현장의 일생과 여정을 줄줄이 설명하는데 정말 열심이고 해박하더군요. 저도 대충은 알고 있는 내용들이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잘 못 알아듣겠으면 쓰라고 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아가씨 우리말도 조금 하고 쓸 줄도 알더군요. 어찌나 기특한지 우리말로 중을 <스님>이라고 하는데 이건 僧자와 님 자가 합쳐져 만들어 진 말이라는 등 나름대로 나도 우리 말 가르쳐 주고 등등 분위기 참 근사했어요. 안휘성 황산에서 온 주정이라는 아가씨. 혼자 다니다 보면 너절한 식당이나 거리에서 우연히 이처럼 난초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중국 아가씨들을 가끔 보게 되는 데 이럴 땐 기쁨 두 배죠.(다음 날 저녁 먹으러 갔던 허름한 식당에서도 이런 난초를 하나 만났어요) 아무튼 대충 지어낸 얘기로 얼버무리기 일쑤인 일부 조선족 가이드들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현장의 정수리 뼈 얘기도 이 아가씨 설명이 없었으면 그냥 바라만 봤을 겁니다. 남경에서 나머지 뼈를 봤을 때의 감동도 없었을 테죠. 사진 한 장 같이 안 찍었던 게 아쉬웠습니다. 이 아가씨 왈 "한국 사람들 가이드를 하고 싶은데 조선족가이드들이 전부 독차지하고 있어요." 한국인을 가이드하고 싶어 하는 중국 가이드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죠. 아무튼 우수했어요.( 첫날 이 우수한 가이드를 만나는 바람에 다음 행선지마다 중국가이드들을 불러 중국어 공부 겸 안내를 받았는데 그러다 병마용에서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중국가이드라고 다 우수한 건 아니었어요. 평균적으로 조선족 가이드보다 해박한 건 사실이지만).
대안탑의 인터넷 주소는 www.daciensi.com 건물들이 크고 높아서 그 안에서는 사진이 잘 안나옵니다. 다음엔 중국 최초의 이슬람 사원 청진사에 대해 말씀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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