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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운의 북경일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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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민재 댓글 2건 조회 1,326회 작성일 04-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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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15분경, 우리는 자금성의 해자를 끼고 각루를 돌아 정문인 오문 앞에 이르렀다. 자금성 관광은 따로 입장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우측 편에는 단아하게 기와를 올린, 맞배지붕을 한 매표소가 있었다. 이 오문을 처음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거대한 위용에 기세를 눌릴 법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태어나서 이렇게 큰 문은 실로 처음 본 것이었다. 천자5문 중 4번째에 해당하는 오문,,, 이 문은 높이가 무려 38m, 위압적인 붉은 벽의 두께는 36m이니, 동양뿐 아니라 가히 세계에서도 제일 큰 문이었다. 중앙의 2겹 지붕으로된 대형누각 또한 규모에 있어서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었다. 이뿐아니라 형태 또한 오페라극장의 관람석처럼 ‘ㄷ''자로 되어있었고, 중앙의 중심누각 좌우로 보다 작은 누각이 2개씩 모두 4개나 더 있었다. 이는 각각 종루와 고루인데, 자금성 내 태화전의 공식 행사나 황제의 오문 출입시, 종과 북을 쳐서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오문의 이 5개의 누각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오봉루(五鳳樓)‘라고도 한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중앙의 대형누각에서 청나라 시절의 황제는 군대의 출정, 개선시 열병식을 받았고, 그 외 중요한 연례행사, 의식을 치르기도 했으며, 고위 관리의 반역사건을 심문하고 취재하기도 했다. 이 앞에 서면 설령 죄없는 선량한 관리라 할지라도 어찌 압도당하지 않았겠는가. 없는 죄도 만들어 불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연행사로 이곳을 찾은 무수한 조선의 엘리트들(당시 정사, 부사, 서장관 등은 모두 왕의 인척 내지는 당상관이었음)은 삼궤구고두의 예를 익히고 이 오문 앞에서 몇시간, 혹은 몇일을 기약없이 기다려야만 했으니,,, 이들을 바라보는 만주족 오문 문지기는 또한 얼마나 이들을 가소로워했을 것인가....

오문을 앞에서 보면 천안문, 단문과는 달리 문이 3개밖에 안 보인다. 하지만 오문을 들어가서 뒤돌아보면 문이 5개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문은 틀림없이 5개인데, 들어갈 때 3개밖에 안 보인 것은 종루와 고루 때문에 좌우 2개의 문을 측면으로 만들어놓아서이다. 오문 앞에서는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야 했으며, 그 중에서도 중앙의 출입문은 다른 정문들과 마찬가지로 황제만이 다닐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을 포함하여, 지금의 관광객들은 모두 가운데 정문으로 들락날락하는데, 이는 청나라시절엔 고관대작이라도 누리지 못할 영광이었던 것이다.

사실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던 인물은 황제 이외에도 있었다. 우리 일행이 오문을 들어가서 금수교와 태화문을 바라볼 때, 안내원인 김진천 선생이 해준 말이다. 첫 번째는 바로 황후였는데, 그녀는 일생에 딱 한번 즉, 결혼식을 올릴 때 오문의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함풍제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갔던 서태후는 이 중앙문을 못 거쳐 한이 되었다. 그녀는 아들인 동치제를 낳았기에 함풍제가 죽자 궁궐안 서쪽에 살며 서태후가 되었고, 함풍제의 정식 황후는 동치제의 양어머니가 되어 궁궐안 동쪽에 살며 동태후가 되었다. 동태후는 서태후에 비해서 훨씬 온화한 성품의 여자였던 터라, 두명의 태후가 20년 동안 같이 수렴청정을 했지만, 실제로는 서태후의 전단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동태후는 가벼운 병으로 누워있다가 문안인사차 들른 서태후가 놓고 간 전병(떡+과자)을 먹고 급사하였다. 사실 이와 유사한 예는 조선시대 문정왕후(내가 좋아하는 전인화가 이런 역할을 해 안타까웠다...^^)가 인종을 죽인 것과 많이 유사한데, 이 두 사건 모두 죽음의 결정적 증거가 남아있는 것은 없다. 단지 정황으로 볼 때 독살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인 명종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양아들을 죽인 문정왕후는 그렇다치고, 서태후는 순진하기 그지없고 별 실권도 없는 동태후를 왜 죽였을까?... 물론 그녀가 광서제와 친히 지냈기에 위협을 느꼈을 수도 있다. 굳이 독살을 했다면 아마도 그런 정치적인 요인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중여인의 질투는 비단 조선왕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태후는 평소 오문의 중앙출입문으로 들어온 동태후를 지극히 질투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동태후 독살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사람도 있으니,, 믿거나 말거나다....

서태후의 질투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진비정(珍妃井)’에 얽힌 스토리 또한 서태후의 됨됨이를 잘 보여준다. 동치제가 1875년에 18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서태후는 친조카인 광서제(서태후 여동생은 함풍제 동생의 부인이었고, 광서제는 그 소생)를 황제로 옹립하고 정권을 농단하게 된다. 당시 광서제의 부인으로는 비련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될법한 ‘진비(珍妃)’가 있었다. 아마도 이 여인이 상당히 똑똑했나본데, 그게 화근이었다. 1900년 8월, 의화단 사건으로 8개국 연합군이 자금성에 들이닥칠 위기에 처하자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西安)으로 피신하려 했다. 평소 보수적인 서태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진비는 이때 서태후를 막고 나섰다. 황제는 자금성에 남아 연합군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태후에게 눈엣가시였던 스물다섯살의 진비는 이 일로 자금성 동북쪽의 경기각 뒤편 우물에 던져졌는데, 현재 그곳엔 우물을 상징하는 돌로 만든 작은 절구통같은 것이 놓여있다고 한다. 이른바 ‘진비정(珍妃井)’이 바로 그것이다.

황후 말고 이 중앙문을 지나갈 수 있었던 또한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들어갈 때는 아직 합격증을 받지 못했으므로 황제로부터 합격증을 받고 나올 때 평생 딱 한번 이 ‘황제의 문’을 거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급제자가 이런 영광을 누릴 만큼 대단한 사람들이었을까?... 동아시아 역사상 인재등용의 창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과거제도,,, 여기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중국사연구자 중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091-1995)란 양반이 있다. 중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미야자키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20세기 일본의 중국사학계의 양대산맥은 도쿄(東京)학파와 교토(京都)학파인데, 미야자키는 바로 교토학파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인물이다. 그의 불후의 연구저작은 ‘구품관인법의 연구’이지만, 사실 나는 그가 역사학의 대중화에 공헌한 공로도 그에 못지 않게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의 역작이 바로 ‘중국의 시험지옥-과거’라는 책이다. 200페이지 남짓한 비교적 적은 분량의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 1989년의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풍토에서는 중국사는 물론이고 한국사 분야에서도 이처럼 딱딱한 주제를 재미있게 서술한 책이 없었다. 요즈음 서점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대중역사서는 당시로서는 거의 구경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어쨌든 이 책은 일본의 중국사 최고의 전문가가 서술한 것이지만, 결코 딱딱한 책이 아니다. 그다지 역사적 지식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다보면 웃음과 놀라움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단숨에 책장을 넘길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 말 그대로 과거는 ‘지옥’과도 같은 제도였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사실 그런 영향력이 여전하지만, 과거 중국에서도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신분상승과 아울러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지옥같은 과거제도는 태어나서 옹알이를 할 무렵부터 사람을 옥죄기 시작한다. 3살이면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5살엔 서당을 가고, 이때부터 소학과 4서3경등 온갖 유학경전과 씨름을 해야 한다. 이러한 공부는 유효기간이 따로 없었다. 그저 합격될 때까지 청춘을 다 바쳐야 했다. 지방의 시험과 중앙의 시험을 모두 거치는데 자그마치 10번의 합격을 필요로 했으니, 그 넓은 중국 땅의 인재란 인재는 모두 이 한가지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찌 지옥이 아니겠는가. 자연히 온갖 부정이 행해지고 소위 컨닝의 수법도 상상을 초월하곤 했는데,,, 오래되어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이 책 앞쪽의 자료사진 중 옷가지를 온통 경서의 내용으로 빼곡이 채운 ‘컨닝 옷’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여튼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오문을 지나 태화전에서 황제로부터 합격증을 받을 때의 그 환희, 그리고 평생 한번 오문의 중앙문으로 나올 때의 감격이란,,, 아무리 짐작한다 해도 모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문의 중앙문은 지상에서 최고의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과, 최고의 신분을 획득한 사람, 그리고 최고의 신분상승을 이룩한 사람만이 지날 수 있는 명실공히 ‘최고의 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오문을 지나면 약 120m 전방에 또하나의 커다란 문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자5문 중 마지막인 태화문(太和門)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집무를 보는 이 태화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한가지 더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금수하(禁水河)였다. 폭이 족히 10m는 되는 물이 좌에서 우로 흘러가고 그 위에 횐 대리석으로 된 5개의 다리가 있는데, 다리 이름은 금수교(禁水橋).... 천안문 앞에도 또한 금수교가 있기 때문에, 태화문 안에 있는 이 금수교는 내금수교라고 해야 더 정확한 것이다. 이러한 ‘금수(禁水)’의 역할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상징적으로 구분하는 것인데, 비슷한 구조를 우리는 사찰에서도 볼 수 있다. 사찰의 금수가 속세와 피안의 세계를 구분짓듯이, 궁궐의 금수 역시 속인들이 사는 영역과 신성한 황제가 사는 영역을 구분짓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궁궐을 살펴보면 이 역시 대동소이한 구조로 되어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제에 의해 헐리워진 경복궁의 홍례문과 영제교(永濟橋)는 근래에 총독부건물이 헐리면서 다시 복원되었다. 홍례문이 자금성이 오문이라면, 근정문은 바로 태화문인 셈이니, 중국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그 사이에 금수가 흐르도록 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금수를 금천(禁川)이라 하였고, 모든 궁궐에는 각각 금천교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있다. 그러나 금천교(禁川校)는 보통명사이고, 궁궐마다 각기 금천교를 가리키는 고유 명칭이 있으니,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濟橋)이고, 창덕궁은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리나라 모든 궁궐의 금천교는 임금과 백성을 잇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경복궁의 영제교는 자금성 앞의 금수교보다 적은 3개의 다리가 놓여있는데, 이 세갈래 길 중 가운데 길이 가장 넓다. 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가운데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만이 다닐 수 있었다. 근정전에서 조회가 열릴 때에는 참석하는 문무백관들이 일단 다리 남쪽의 정해진 위치에 도열해있었다. 그 후 시간이 되면 안내를 받아 근정전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다리는 신성하고 지엄한 공간과 외부 속세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통로였던 것이다(영제교와 관련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한편 자금성의 금수는 이상에서 말한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이를테면 화재진압을 위한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고, 또 황궁은 용이 살고 있는 곳이니 용이 힘을 쓰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또한 5개로 이루어진 금수교는 유교의 오덕인 온화, 양순, 공순, 검소, 겸양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오행의 인, 의, 예, 지, 신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cf)
지루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자꾸 얘기에 살이 붙네요..^^
내일부터는 좀 속도를 내겠습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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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완님의 댓글

조창완 작성일

  지루하긴요, 읽으시는 분은 다시 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날겁니다. 아주 재미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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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XiuYi님의 댓글

Sun XiuYi 작성일

  에고...오늘에서야 올리신 북경여행기를 읽었습니다.
북경일기가 연재되고 있는 줄도 몰랐다는...민망합니다.-_-;
참 자세하고 섬세하게 잘 기술해 놓으셨군요.
어떻게 이걸 다 기억하고 기록하셨는지..
글 읽다보니 여행 갔을 때의 풍경들과 광경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