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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운의 북경일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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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민재 댓글 0건 조회 1,340회 작성일 04-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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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가 조금 넘어 잠에서 깼다. 정연조 선생은 벌써 일어나 있었다. 오늘은 3월 19일, 토요일이다. 나는 여전히 게으르게 침대에 누워 몽롱한 상태로 자금성, 이화원, 북경대학 등 오늘의 일정을 그려보았다. 드디어 오늘은 자금성을 보는 날이다. 천안문을 지나 단문, 오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오늘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감개무량한 날이 되라라...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 아침식사를 위해 우리는 호텔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이미 이혜영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두 번에 걸친 작년의 중국여행 기간 동안 매번 호텔에서 잤고, 그래서 이와같은 호텔에서의 아침식사가 제법 익숙해져있었다. 내 생각엔, 호텔 아침식사의 수준이 호텔 자체의 등급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별5개짜리의 호텔에서 자본 적은 없었고, 주로 3성, 혹은 4성급에서만 숙박했었는데, 사실 이런 등급은 대도시와 소도시의 지역적 차이에 따라, 심지어 같은 지역 안에서도 편차가 다양해서 일률적으로 평가하기가 힘들다. 작년에 단동의 3성급에서 먹었던 아침식사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사실 그것이 어쩌면 제대로 된 중국인의 아침식사였을 터이지만, 도저히 구미에 안맞는 두부요리와,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샹차이(香菜)가 분별할 수 없게끔 섞여있어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 아침식사는 그야말로 외국인인 나에게는 최상의 수준이라고 할 만했다. 빵을 아침식사 대용으로 하는 사람에겐 최고의 아침식사였을 터이고, 아침에 꼭 밥을 챙겨먹는 나같은 사람을 위해 볶음밥이 마련된 것도 좋았다. 다양한 과일과 쥬스, 야채, 만두, 그리고 무엇보다도 즉석에서 해주는 계란후라이가 맛있었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8시 15분 경에 우리는 호텔을 출발하여 자금성으로 향했다. 길거리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비록 음식적응을 잘 못하는 나이지만, 중국인의 아침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랬다. 김진천 선생의 말에 의하면, 중국 일반사람들의 아침식사 비용은 대략 3위엔(450원) 정도라고 한다. 주로 순두부(이것이 과연 우리식의 순두부인지는 모르겠지만)와 빨강, 파랑색의 썪힌 두부같은 것이 주 메뉴인데, 이건 역시 직접 설명을 들어가며 먹어봐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김선생이 말하기를, 명태조 주원장의 4째 아들이 바로 성조 영락제인데, 때는 우리나라 조선 세종 시절이었는데, 순두부를 몹시도 좋아했던 영락제는 조선 세종에게 두부 잘 만드는 조선 여자들을 중국으로 보내라 요구하였고. 이것이 이른바 공녀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김선생은 공녀를 요리실력이 뛰어난 조선의 여인들로 착각을 하는 듯하여 약간 실소가 나왔다. 명나라 초기, 즉 조선초기에도 상당히 많은 양가집 규수들이 공녀로 차출되어 가족과 생이별을 하곤 중국으로 끌려가야 했는데, 이런 기막힌 역사를 접어두고 공녀를 순두부 요리의 실력자로 미화시킨 김선생의 진지한 설명을 유우머로 받아들여야 할지....... 그러나 이것은 옥의 티로 넘겨버릴 수 있으리라.. 나는 김선생이 이번 여행에서 보여준 유익한 설명, 성실한 안내를 높이 사고, 또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자금성으로 이동할 때, 각자 앞에 나가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이미 하루를 같이 움직인 터라 낯설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소개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한 느낌이 더 잘 전달되는 것도 같았다. 순천에서 세 아이를 데리고 그야말로 장정을 오신 수학선생님, 김민자 선생의 가족소개는 막내인 깜찍한 초등학생 난희의 몫이었다. 처음엔 몹시도 빼더니, 어린 학생다운 솔직하고 귀여운 가족소개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일행의 가장 큰 특색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독자층이라는 것이었기에 대체로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고 정선생도 그렇고, 몸은 중국에 와있었지만, 문득문득 긴박하게 돌아가는 탄핵정국이 몹시도 궁금하였다. 과연 돌아가면 나흘 동안 어떤 뉴스가 기다리고 있을지......

자,,, 이제 드디어 자금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천안문에서부터 곧장 북쪽 궁궐로 향하리라던 나의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천안문 중앙출입구에서 보면 단문을 지나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이 보인다는데, 사실 이렇게 들어가야 황성의 웅장함을 더욱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마도 버스를 주정차시키는 문제 때문이었을텐데,,, 어쩌겠는가.... 우리 일행은 자금성의 동문인 동화문(東華門)에서 약 300m쯤 떨어진 곳에 내려 동화문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나는 북경에서 자금성을 보고간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은 북경성을 머리 속에 제대로 넣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북경에 오기 전에, 또 오는 비행기 안에서 만화로 된 자금성 관련책자[‘자금성을 걸으며 중국을 본다(진병팔, 청년정신, 2002)’]를 자꾸 들여다보며 익혀야 했다. 과연 왜 그럴까? 여기에는 용어상의 혼란이 있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 중 ‘황도기략’의 첫 번째 대목에서 ‘皇城九門’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이 설명만 보면 머리 속에서 지도를 그리기 힘들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용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즉, 북경성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4가지 단어를 확실히 알아두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내성(內城), 외성(外城), 황성(皇城), 자금성(紫禁城) 등이다. 이 네 개를 통틀어 북경성이라고 하는 것이니, 모두 5가지 용어인 셈이다.

북경성을 어떻게 설명하면 머리 속에 쉽게 그려질까..... 북경성을,,, 말하자면 TV와 TV받침대의 전체 평면도라고 한번 생각해보자. 평면도상으로 말하면, TV 받침대는 TV보다 약간 폭이 넓으며 아래로 튀어나왔다. 여기서 TV받침대에 해당하는 부분이 북경성의 외성(外城)이고, TV에 해당하는 부분이 내성(內城)이다. 또한 TV 전체보다 약간 작은,,, 화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황성(皇城)이라고 간주하면, 자금성은 바로 이 화면 안에 있는, 화면보다 작은 또 하나의 독자적인 궁성이다. 정리해보면, 북경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는데, 내성 안에는 황성이 있고, 다시 황성 안에는 자금성이 있는 것이다. 이 5가지 용어의 형태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으면 그때부터는 북경 한복판의 거리 이름이나 문 이름을 외우기가 간단해진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말하는 ‘황성9문’은 정확히 말하면 내성의 9문을 말한다. 즉 내성 북쪽에 2개(덕승문, 안정문), 동쪽에 2개(동직문, 조양문), 서쪽에 2개(서직문, 부성문), 남쪽에 3개(정양문과 전루(前門), 선무문과 전루, 숭문문과 전루)의 문을 일컬어 황성9문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첫날 저녁 취엔쮜더에서 오리구이를 먹고 거리를 걸어나와 버스를 탄 곳에 있었던, 화려한 두 문 중 앞의 것이 정양문(正陽門)이고 뒤의 것이 전루(箭樓)인데, 이 정양문이 바로 북경성의 내성 남문, 즉 내성 정문이 되는 것이다. 정양문의 좌우로 성이 쌓여있어 다른 나머지 8개 문과 연결되어 있어야 마땅할 터이지만, 이는 현재 서울 4대문의 신세를 생각해보면 된다. 다만 거리이름과 건축물에는 9문의 자취가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으니, 지도를 한번 펼쳐보면 알 수 있다. 전문동대가(前文東大街), 전문서대가(前文西大街), 숭문문동대가, 선무문서대가, 조양문대가 등등의 거리이름과 조양문교(朝陽文橋) 등의 건축물 이름이 그 예이다.

다음으로 황성의 문을 살펴보자. 우리가 중국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있는 천안문(天安門)은 바로 황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다. 이 황성의 동문은 동안문(東安門), 서문은 서안문(西安門), 북문은 지안문(地安門)이니, 황성의 문에는 모두 ‘안(安)’자가 들어감을 알 수 있다. 또 천지(天地)와 동서(東西)가 서로 대비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천안문을 자금성의 정문 정도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잘못된 상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금성의 정문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자금성을 들어갈 때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처음 들어갔던 오문(午門)이 자금성의 정문이 된다. ‘오(午)’라는 말 자체가 정남쪽을 뜻하는데, 이는 북쪽의 음기로부터 자금성을 보호하고 남쪽의 양기를 받들어 바르고 큰 정치를 펴고자 함이다. 자금성의 동문은 동화문(東華門)이고 서문은 서화문(西華門), 그리고 북문은 신무문(神武門)이다.

이상을 경복궁과 비교하면 어떨까.... 우선 천안문에 해당하는 것이 광화문이고, 오문에 해당하는 것은 홍례문이다. 최근 경복궁에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고 새로 복원된 것이 홍례문인데, 이 홍례문은 조선 초기에 처음 만들어질 때 이름이 바로 '오문‘이었으니, 자금성의 오문을 본 뜬 것이다. 천자가 사는 궁궐에는 문이 5개이고, 제후가 사는 궁궐에는 문이 3개인데, 이것을 중국과 조선의 궁궐 문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북경성의 황제가 사는 궁궐 5문은 태청문, 천안문, 단문, 오문, 태화문이고, 조선의 궁궐 3문은 광화문 홍례문, 인정문이다. 태청문은 현재 천안문 광장 즉, 천안문과 정양문 사이에 있었던 문이고, 단문은 천안문과 오문 사이의 문이다. 즉 조선에 비해 중국은 천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태청문과 단문이 더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밖에 경복궁의 후문도 신무문으로 자금성 후문과 이름이 똑같고, 건청궁, 교태전도 같은 명칭이다.

한편 외성은 우리가 마지막날에 본 천단공원을 포함하는 남쪽의 구역인데, 여기에도 동편문, 서편문, 광거문, 광안문, 좌안문, 우안문, 영정문 등 7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외성의 성문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문들은 성벽과 함께 헐려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존하는 북경성의 문은 자금성과 그 남쪽의 오문, 단문, 천안문, 정양문 및 전루, 덕승문과 전루 뿐이고, 기타 황성, 내성, 외성의 성벽과 문들은 모두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여러 성문들은 거리와 건축물의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고, 특히 지하철 역명으로도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옛 북경성의 흔적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 9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다가간 동화문(東華門)은 바로 자금성의 동문에 해당된다. 자금성의 네 모퉁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각루인데, 해자의 폭은 무려 52m나 된다고 하니, 과연 이로써 자금성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각루는 사방을 볼 수 있는 3층의 다각집 형태의 건물인데, 이 건물은 멋진 외관 때문에 ‘신선루(神仙樓)’라 한다고도 한다. 우리는 동화문의 왼쪽으로 돌아 해자(垓字)를 보며 각루(角樓)를 지나 걸었다. ‘ㄱ'자로 꺾어진 자금성의 높고 붉은 담벽과 각루, 해자는 봄맞이를 위해 갓 푸르름을 띠기 시작한 버드나무와 조화를 이루며 상춘객들로 하여금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하였다. 우리 일행은 대부분 잠시 멈추어 사진을 찍고 또 찍어주고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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