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운의 북경일기...(5) > 알자 여행기

본문 바로가기

알자 여행기

알자 여행기 HOME


저운의 북경일기...(5)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민재 댓글 1건 조회 1,245회 작성일 04-03-26 00:00

본문

신동안시장에서 북쪽 고루(鼓樓)가 있는 방향으로 걷다 보니 오른쪽에 아담한 성당이 하나 보인다. 성당을 지나 조금 걸으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회전하여 300m쯤 걸으면 우측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큼직하게 세로로 새겨진 ‘老舍紀念館’이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시 시간이 종료되어 우리는 멋쩍게 문밖에서 사진 몇 장 찍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역시 여기에도 아까 쓰허위엔에서처럼 문 왼쪽에 ‘北京市文物保護單位 老舍故居’라고 씌여있었다. 날짜를 보니, 건립한 시기는 1984년 9월이었다. 다시 그 옆에 상세한 설명글이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라오서는 여기서 1950-1966년의 만 16년을 살았다. 그가 억울함을 벗고 복권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19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온전히 자신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기념관 건립은 곧 그의 복권을 공식적으로 의미하는 상징물이라고 하겠다. 한편 라오서는 죽었지만, 용케도 그때까지 살아있던 여류작가 딩링(丁玲)도 같은 해 8월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는데, 아마도 이때가 마치 우리로 치면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던 1989년 무렵과 비슷한, 시대의 한획을 긋는 그런 시기였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쌓여있는 책더미 속에서 잊혀져가던 ‘루어투어시앙쯔’를 다시 꺼내어보았다. 라오서,,, 그는 부계로 보나 모계로 보나 영락없는 만주 기인(旗人, 이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너무 장황할 것 같아 생략하겠다)의 후예였다. 소설에서 시앙쯔가 기인의 후예인 것은 그가 시앙쯔의 모습에 자신을 고스란히 투영시켰기 때문이었다. 연보를 보니, 그의 아버지는 팔기군 중에서도 정홍기(正紅旗)에 속하는 하급병사였고, 어머니는 성이 마(馬)씨로서, 정황기(正黃旗) 계열의 기인으로 판명된다고 한다. 아마도 요동지방의 선양(瀋陽) 고궁에 가본 사람이라면 만주팔기의 위용있는 전각들을 보았을 것이다. 라오서는 또한 전형적인 북경사람이었다. 그는 북경 서쪽구역의 샤오양쟈후통8호(小楊家胡同八號)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우리가 경산공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났던 덕승문(德勝門) 밖의 가난한 농가 출신이다. 그가 태어난 후통은 나중에 그의 소설 ‘四世同堂’의 가정모델이 되기도 했다니, 명실공히 그는 북경인이면서 또한 이제껏 얘기했던 ‘후통’을 무대로 살았던 주인공인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루어투어시앙쯔의 해제를 무려 200쪽이 넘게 쓰면서 그 특유의 논리적 장광설을 풀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자신과 라오서는 여러가지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단다. 라오서는 영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산동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본디 글쓰기에 미칠 정도로 열중하여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을 하늘이 주신 기회로 알고 죽어라 글을 썼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팽개치고 불안하기 짝이없는 전업작가로 들어서는데, 그리고나서 첫 번째 발표한, 그 자신도 평생 가장 만족스럽다고 자부한 작품이 바로 ‘루어투어시앙쯔’였다. 이는 실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니, 때는 1936년이었다. 그런데 도올 역시 대만, 일본, 미국의 유학길을 돌아 한국에 다시 와서는 고려대학 교수가 되었고, 또한 방학을 이용하여 죽어라 글만 쓰다가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도올 자신이 교수직을 접고 처음 쓴 글이 바로 루어투어시앙쯔의 해제이고, 이때가 1986년으로 루어투어시앙쯔가 씌여진지 50년만이며, 라오서가 혁명을 가장한 미명의 광기로 불귀의 객이 된 지 20년 만이다. 비슷하다고 우기면 뭐 또 그럴 법도 하다...^^

기념관 옆에 간략히 쓰인 라오서의 연보에는 그가 1951년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까지 라오서와 같은 류의 작가들이 설 땅은 그리 넓지 못했다. 라오서의 삶은 마치 백석이 월북 후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색채를 잃고 휘청거리다 스러져간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백석을 특히나 좋아하고, 그의 시 중에서도 ‘흰 바람벽이 있어’를 제일 좋아하는데, 라오서의 삶이 문득 이 시와 오버랩된다. 어쨌거나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이후 ‘정치에 충실히 복무하는 문학’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하다가 해서파관과 연관되어 비극적인 종말을 맺는다. 그가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북경에 첫발을 내디딘 공자님 계신 국자감이었고, 몇일 후 그가 죽은 1966년 8월은 바로 내가 세상에 태어난 그 해, 그 달이었으니, 나 역시 그와 기연이 있다면 있을 법도 하다. 지금은 메워 없어져버린 북경사범대학 남쪽의 태평호 서안에서 라오서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담이지만, 도올은 라오서와 자신은 정반대의 원칙을 가지고 살았다 한다. 즉 도올 자신은 청탁받은 글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했고, 라오서는 청탁받은 글은 모두 거절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평생 일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오서는 20세기 중국의 최다산(最多産) 작가이다. 이런 원칙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오서와 도올은 확실히 인생의 후반부가 달라보인다. 라오서의 말로는 비참했지만, 도올은 아직도 TV 공중파에서 시대를 거스르는 야당의 탄핵횡포에 대해 “대체 이게 뭐하는 짓거리들이냐”고 당당히 일갈하고 있으니, 적어도 라오서가 기철학으로 단련된 도올의 내공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

라오서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나는 기념관을 돌아서 다시 신동안시장으로 가는 길을 유심히 봐두었다. 나중에 다시 와서 기념관에 들어가보아야 하니까... 가는 길에 아까 잠시 들렀던 성당구경을 했으나, 이것이 설마 연행록에서 우리 사신들이 가보곤 하던 동천주당은 아니겠지 하며 발길을 돌렸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 우리는 조금 시간이 남아서 이번엔 반대쪽인 남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바로 건너편 우측엔 외문서점(外文書店)이 있었는데, 예전엔 매우 유명하고 큰 서점이었지만, 지금은 왕푸징서점(王府井書店)이 그 지위를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왕푸징서점이 있는 곳까지 한참을 내려가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어서 우리가 들어간 곳은 건너편의 샤오츠 거리였는데, 샤오츠는 말하자면 오뎅과 떡볶이같은 군것질먹거리를 말한다. 거리로 들어서는 입구의 문은 마치 성의 문루처럼 높게 만들어놓았는데, 그 위에는 푸른색바탕에 금색 글씨로 왕푸징샤오츠지에(王府井小喫街)라는 글씨가 멋지게 씌여있었다. 호기심에 가득차서 거리로 들어가보니 중국에서 파는 온갖 꼬치구이요리는 다 모인듯했다. 똑같은 형태의 집들이 지천으로 늘어서있는데, 파는 메뉴는 대개 엇비슷했다. 양고기꼬치(羊肉串), 소고기꼬치(牛肉串)는 물론이고, 생선으로 만든 꼬치와 심지어 전갈구이꼬치도 있었다. 한 꼬치에 다섯 마리씩 꽂아놓은 이 전갈꼬치를 조선생은 재미있게 소개하였지만, 나는 소름이 돋았다.

<계속>

댓글목록

profile_image

조창완님의 댓글

조창완 작성일

  역시 예민한 조형의 시각이십니다. 쉽게 스쳐갈 길들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회고해주니 너무 감사합니다. 역시 기록자들은 따로 있나 봅니다. 전 정말 젬병에 젬병인데, 너무 잘 기록해 주시네요.

싼리툰에 못 데려간거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구요. 다음에 중국에서 찐하게 술 살날 있을 겁니다.
항상 건강하게 잘 지내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