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운의 북경일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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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민재 댓글 0건 조회 1,284회 작성일 04-03-25 00:00본문
북경의 중심 건물들은 자금성(‘즈진청’으로 표기하는 것 보다는 편의상 익숙한 이름이 낫겠다)에서부터 일반 서민의 건물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궁궐 같으면 왕이, 개인 주택같으면 가장이 바로 이 건물에 기거한다. 과거 쓰허위엔엔 보통 여러 세대가 함께 모여 살았는데, 일단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신분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내 세상, 내 가족만이 존재하는 독립된 공간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공간배치는 화북지방의 매서운 바람과 황사를 막기에도 좋았고, 또 자기중심적, 내부지향적 북경 사람들의 성격이 주택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란 분석도 있다. 박현숙 선생의 글에 보니, 이 구조는 또한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 가족제도와 계급, 계층구조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건축양식이라고도 한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 일행은 복잡한 미로처럼 얽혀있는 건물들을 지나 오른쪽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이 쓰허위엔엔 무려 26가구나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다다른 건물은 이 쓰허위엔의 26가구 중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안주인은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차와 다과를 내왔다. 우리 일행은 마루와 방에 절반씩 나누어 자리잡고 앉았다. 천장은 우리나라 일반 아파트보다 두 배는 높아보였다. 방 안의 흰색 천장 중앙에는 형광등, 그리고 양쪽 구석에는 통풍구가 있고, 사면 벽에는 장식품, 족자, 서화가 있었다. 특히 눈길을끄는 것은 화주석, 즉 화궈펑(華國鋒) 주석과 집주인을 비롯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찍은, 길이 2미터는 족히 되는 사진이었다. 날짜를 보니 1977년 1월 23일로 되어있었다. 화궈펑은 모택동 서거이후 등소평이 집권하기 이전의 공백기에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지낸 인물이다.
안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캉홍쥔(康宏群)이고 나이는 54세, 바깥주인의 이름은 쨩지엔궈(張建國)이고 나이는 그녀와 동갑이란다. 쨩지엔궈씨는 현재 연탄회사의 사장이며, 이곳 쓰허위엔에 살고 있는 26가구는 모두 같은 회사 직원의 가족이다. 이들 부부는 처음부터 현재의 건물에 산 것은 아니고, 10년여년 전에 사장이 되면서 쓰허위엔 안의 다른 건물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들이 이곳 쓰허위엔에 처음 자리잡은 것은 약 25,6년 전이라고 하니, 때는 바로 문화대혁명의 칼바람이 스러지고 개혁개방의 물결이 당도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위의 사진은 이들이 하방에서 돌아온 후, 남편이 연탄회사에서 근무할 때 회사를 방문한 화궈펑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이들 부부는 모두 북경 출신인데, 문화대혁명 때 하얼빈으로 하방(下放)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이들의 출신이 지식인 계층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집을 나오고 나서도 나는 안주인의 친절한 답변과 웃음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들 부부의 삶이 곧 파란만장했던 중국 현대사의 압축이 아니겠는가. 시간만 더 있다면 차분히 그들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말이 막히면 필담으로라도 말이다.
우리는 쓰허위엔을 나와 다시 자전거마차를 타고 원래 관광을 시작했던 지점으로 향했다. 골목이 하도 구불구불하여 동서남북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아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후통 안의 상점들이 이제 하나하나씩 흥미롭게 다가왔다. ‘小賣部’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구멍가게’일 터이고, ‘理髮館’은 그대로 ‘이발소’, ‘鮮肉店’은 신선한 고깃간, 즉 ‘정육점’,,, 뭐 이런 식이어서 글자만 알면 대략 그 상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1시간 남짓한 후통관광을 끝내고 우리는 5시 10분 경에 차에 올라 왕푸징을 향해 출발했다. 왕푸징은 자금성 동쪽에 위치한, 말 그대로 왕족이나 공경대부들이 살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북경 최고의 번화가로서 명성이 높다. 이동하는 동안 김진천 선생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얘기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북경에 많은 3가지 것은 권력자, 부자, 그리고 한가한 사람들이란다. 경산공원 근처에서 여유있게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앉아서 노는 사람들을 보고 김선생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백수가 많다는 얘기로 오해하겠지만, 그런 의미보다는 생활 속에서 항상 여유를 찾는 북경인들을 긍정적으로 일컫는 말 같았다.
김선생은 외국사람들이 중국을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비유를 들었는데, 이른바 호랑이와 고양이의 구분에 관한 것이었다. 즉, 어린 시절에는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구분도 잘 안되고, 또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자라고 나면 그 차이가 확연하고 섬짓한 것이니,,, 과거와 현재의 중국, 혹은 현재와 미래의 중국의 실체를 외국사람들이 자못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비유였다. 이러한 설명에 대한 은근한 뉘앙스가 우리들로 하여금 김선생이 명실공히 중국인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어쨌든 다민족국가인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볼 때, 김선생은 ‘조선족이면서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하나도 상치되지 않는 것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민족과 국가가 거의 일치되어 살아온 우리들로서는 이런 명제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가 가되 심정적으로는 동의가 안되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대하면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바로 “당신은 한국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 중국에 대해서는 또 어떠하냐” 혹은,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당신은 어디를 응원하냐”는 등의 곤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는 마침내 왕푸징에 도착했다. 예전에 밤거리를 한번 거닐었었는데, 지금은 방향이 짐작이 안되어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를 않았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건만 내려서 조금 걷다보니 붉은색 포장마차에 홍등을 하나씩 달아둔 점포가 줄잡아 100여개는 연이어 늘어서있었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조금 더 걷다보니 십자 교차로에 이르렀고, 길을 건너니 ‘新東安市場’이라는 최신식 건물 앞이었다. 천안문을 남문으로 하는 황성의 동문이 바로 ‘東安門’이니 ‘신동안’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온 것이었다. 앞으로 왕푸징에 오면 꼭 이 시장을 기준으로 기억을 떠올리리라 마음먹었다.
우리 일행은 6시 30분까지 약 1시간 가량 왕푸징 거리를 자유롭게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나는 차안에서 북경관련 책자를 통해 이곳에 남아있는 왕푸(王府)의 흔적을 좀 구경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송경령이 살던 곳(宋慶齡故居)과 곽말약이 살던 곳(郭沫若故居) 등을 보고 싶었다. 굳이 왕푸의 흔적으로서가 아니더라도, 송경령 곽말약같은 인물의 유품과 유적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감개무량하겠는가.... 이에 조창완 선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곳이 이쪽에서 상당히 멀다는 실망스러운 대답과 함께, 그 대신 라오서기념관을 가보지 않겠느냐는 반가운 제안을 받았다. 이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이라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의했고, 정연조 선생도 발걸음을 함께 하여 우리는 두런두런 라오서기념관을 향해 걸었다. 조선생과 제대로 인사하고 말을 나눈 것은 이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니, 이래저래 라오서는 이 글 속에서 자꾸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팔자라 하겠다.
<계속>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 일행은 복잡한 미로처럼 얽혀있는 건물들을 지나 오른쪽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이 쓰허위엔엔 무려 26가구나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다다른 건물은 이 쓰허위엔의 26가구 중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안주인은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차와 다과를 내왔다. 우리 일행은 마루와 방에 절반씩 나누어 자리잡고 앉았다. 천장은 우리나라 일반 아파트보다 두 배는 높아보였다. 방 안의 흰색 천장 중앙에는 형광등, 그리고 양쪽 구석에는 통풍구가 있고, 사면 벽에는 장식품, 족자, 서화가 있었다. 특히 눈길을끄는 것은 화주석, 즉 화궈펑(華國鋒) 주석과 집주인을 비롯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찍은, 길이 2미터는 족히 되는 사진이었다. 날짜를 보니 1977년 1월 23일로 되어있었다. 화궈펑은 모택동 서거이후 등소평이 집권하기 이전의 공백기에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지낸 인물이다.
안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캉홍쥔(康宏群)이고 나이는 54세, 바깥주인의 이름은 쨩지엔궈(張建國)이고 나이는 그녀와 동갑이란다. 쨩지엔궈씨는 현재 연탄회사의 사장이며, 이곳 쓰허위엔에 살고 있는 26가구는 모두 같은 회사 직원의 가족이다. 이들 부부는 처음부터 현재의 건물에 산 것은 아니고, 10년여년 전에 사장이 되면서 쓰허위엔 안의 다른 건물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들이 이곳 쓰허위엔에 처음 자리잡은 것은 약 25,6년 전이라고 하니, 때는 바로 문화대혁명의 칼바람이 스러지고 개혁개방의 물결이 당도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위의 사진은 이들이 하방에서 돌아온 후, 남편이 연탄회사에서 근무할 때 회사를 방문한 화궈펑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이들 부부는 모두 북경 출신인데, 문화대혁명 때 하얼빈으로 하방(下放)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이들의 출신이 지식인 계층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집을 나오고 나서도 나는 안주인의 친절한 답변과 웃음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들 부부의 삶이 곧 파란만장했던 중국 현대사의 압축이 아니겠는가. 시간만 더 있다면 차분히 그들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말이 막히면 필담으로라도 말이다.
우리는 쓰허위엔을 나와 다시 자전거마차를 타고 원래 관광을 시작했던 지점으로 향했다. 골목이 하도 구불구불하여 동서남북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아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후통 안의 상점들이 이제 하나하나씩 흥미롭게 다가왔다. ‘小賣部’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구멍가게’일 터이고, ‘理髮館’은 그대로 ‘이발소’, ‘鮮肉店’은 신선한 고깃간, 즉 ‘정육점’,,, 뭐 이런 식이어서 글자만 알면 대략 그 상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1시간 남짓한 후통관광을 끝내고 우리는 5시 10분 경에 차에 올라 왕푸징을 향해 출발했다. 왕푸징은 자금성 동쪽에 위치한, 말 그대로 왕족이나 공경대부들이 살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북경 최고의 번화가로서 명성이 높다. 이동하는 동안 김진천 선생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얘기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북경에 많은 3가지 것은 권력자, 부자, 그리고 한가한 사람들이란다. 경산공원 근처에서 여유있게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앉아서 노는 사람들을 보고 김선생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백수가 많다는 얘기로 오해하겠지만, 그런 의미보다는 생활 속에서 항상 여유를 찾는 북경인들을 긍정적으로 일컫는 말 같았다.
김선생은 외국사람들이 중국을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비유를 들었는데, 이른바 호랑이와 고양이의 구분에 관한 것이었다. 즉, 어린 시절에는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구분도 잘 안되고, 또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자라고 나면 그 차이가 확연하고 섬짓한 것이니,,, 과거와 현재의 중국, 혹은 현재와 미래의 중국의 실체를 외국사람들이 자못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비유였다. 이러한 설명에 대한 은근한 뉘앙스가 우리들로 하여금 김선생이 명실공히 중국인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어쨌든 다민족국가인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볼 때, 김선생은 ‘조선족이면서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하나도 상치되지 않는 것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민족과 국가가 거의 일치되어 살아온 우리들로서는 이런 명제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가 가되 심정적으로는 동의가 안되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대하면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바로 “당신은 한국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 중국에 대해서는 또 어떠하냐” 혹은,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당신은 어디를 응원하냐”는 등의 곤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는 마침내 왕푸징에 도착했다. 예전에 밤거리를 한번 거닐었었는데, 지금은 방향이 짐작이 안되어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를 않았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건만 내려서 조금 걷다보니 붉은색 포장마차에 홍등을 하나씩 달아둔 점포가 줄잡아 100여개는 연이어 늘어서있었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조금 더 걷다보니 십자 교차로에 이르렀고, 길을 건너니 ‘新東安市場’이라는 최신식 건물 앞이었다. 천안문을 남문으로 하는 황성의 동문이 바로 ‘東安門’이니 ‘신동안’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온 것이었다. 앞으로 왕푸징에 오면 꼭 이 시장을 기준으로 기억을 떠올리리라 마음먹었다.
우리 일행은 6시 30분까지 약 1시간 가량 왕푸징 거리를 자유롭게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나는 차안에서 북경관련 책자를 통해 이곳에 남아있는 왕푸(王府)의 흔적을 좀 구경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송경령이 살던 곳(宋慶齡故居)과 곽말약이 살던 곳(郭沫若故居) 등을 보고 싶었다. 굳이 왕푸의 흔적으로서가 아니더라도, 송경령 곽말약같은 인물의 유품과 유적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감개무량하겠는가.... 이에 조창완 선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곳이 이쪽에서 상당히 멀다는 실망스러운 대답과 함께, 그 대신 라오서기념관을 가보지 않겠느냐는 반가운 제안을 받았다. 이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이라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의했고, 정연조 선생도 발걸음을 함께 하여 우리는 두런두런 라오서기념관을 향해 걸었다. 조선생과 제대로 인사하고 말을 나눈 것은 이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니, 이래저래 라오서는 이 글 속에서 자꾸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팔자라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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