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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운의 북경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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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민재 댓글 0건 조회 1,283회 작성일 04-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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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생님의 후통에 관한 글은 따로 전체를 저장해 차근차근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앞으로도 제 글에서 부족한 것들을 이처럼 많이많이 보충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전에 나갔다가 저녁나절에 들어와 이제야 펜을 잡았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을 기다리신다니,, 이것도 참으로 적지 않은 부담입니다. 그러나 중국친구들 말하길, 본디 글은 독촉을 해야 나온다(文章都是被逼出來的)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채찍으로 알고 오늘도 이어서 조금 써보겠습니다.

우리가 둘러본 후통은 생각보다 폭이 넓직했다. 인력거(생각해보니, 정확히 이걸 뭐라 하나 모르겠다.)에서 내려 이 후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할법한 시장을 둘러보았다. 이곳 설명을 따로 해주기 위해 똑부러지게 생긴 조선족 아가씨가 파견되었는데, 갑자기 펼쳐진 낯선 이국 풍경에 정신이 팔려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해 아쉬웠다. 시장 안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선홍빛을 적나라하게 뿜으며 널려있는 광경이었다. 사실 우리는 정육점 고기들이 냉장고 안에서 나오는 것에 너무 익숙하지만, 교외로 조금만 나가면, 아니 서울의 재래시장에서도 아직 이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배추, 무, 호박, 고추 등등이 널려있었는데, 아마도 가격은 서울과 비교가 안될 것이었다. 야채를 파는 어린 아가씨의 땋은 머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시장 밖으로 나오니 우리가 어렷을 적에 익히 보며 자랐던 연탄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타고온 자전거마차의 마차 부분이 없는 대신 넓직한 판자를 놓고 그 위에 연탄을 가지런히 쌓았는데, 세어보니 족히 400장이 넘었다. 그것이 구공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에 연탄 두 개의 구멍들을 위아래로 맞추느라 무진 애를 쓰곤 했던 생각이 났다. 구멍이 딱 들어맞았을 때 밑의 연탄에서 확 올라오는 그 가스의 독하고 찡한 맛.... 그걸 계속 맡으면 연탄가스 중독이 되는 거였는데,, 이런 사고로 죽는 사람이 맨날 뉴스에 나와서 나중엔 그야말로 그런 기사에 너무 중독되어 뉴스거리도 안되는 일상사처럼 여기곤 했었다. 지금 이곳 사람들은 어떨까... 연탄을 때우는 아궁이부터 그 방식, 연탄가스 중독사고 등등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조선족 아가씨가 다음으로 우리를 안내한 곳은 후통 골목 안의 요우아위엔(幼兒園), 말 그대로 유아원이었다. 커다란 대문 왼쪽 옆에는 ‘北京市 一級一類幼兒園’이라고 씌여있었다. 안내원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 유아원은 민간항공사 직원의 자녀들이 다니는 곳이라 했다. 그러니 자연 시설이나 교사의 교육수준이 일급, 일류라 할 만한 것인데, 실로 안에 들어가보니 그럴 법도 했다. 너무 귀여워 손길이 절로 가는, 한마디로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행색은 비록 우리나라 아이들에 비해 조금 촌스러웠지만 선생님의 영어노래를 앙증맞게 따라부르는 아이들의 그 똘망똘망한 눈동자란...... 아이들이 뛰어노는 대문 왼쪽의 안채는 아마도 예전에 상류층이 살던 저택임에 틀림없을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또 오른쪽엔 낡은 현대식 3층 건물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일주일동안 먹고 자고 놀다가 주말에 부모들의 품으로 돌아간단다. 아마도 아이를 맡긴 내 또래의 젊은 중국인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이런 방식으로 컸을 것이다. 문득 다섯살배기 우리 은상이가 생각났다. 엄마 아빠가 조금만 늦어도 할아버지한테 전화걸어달라 재촉하여 수화기에다 대고 “아빠, 나 잘까 안잘까?”하고 물어보곤 한다. 은상이 또래밖에 안되는 이 많은 아이들은 일주일동안 엄마 아빠가 얼마나 보고싶을까... 우리 사회나 중국 사회나 부모가 되면, 또 맞벌이를 하다보면 이런 심각한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게 근래의 현실이다. 어쨌든 일급, 일류인 이곳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시설에, 훌륭한 선생님, 많은 친구들이 있지만, 그렇다면 2급, 3류 유아원의 아이들은 어떠하겠는가.....

유아원을 나와 우리는 다시 자전거마차에 올라타고 쓰허위엔(四合院)으로 이동하였다. 거리의 사람들은 줄지어 이동하는 자전거차 행렬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이미 이런 불청객들을 맞이하는 것에 이력이 난 터일까... 쓰허위엔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동서남북 네 면으로 세워진 집들이 가운데에 정원 하나를 에둘러 공유하고 있는 형태의 주택’을 말하는 보통명사이다. 우리가 도착한 집은 벽에 ‘四合院’이라고 또렷이 새겨진 저택이었는데, 여기에 새겨진 내용으로 봐서는 1986년 6월에 북경시 동성구의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듯했다. 따라서 그동안 20년 가까이 적지 않은 내방객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말하면, 중국의 거리를 거닐 때 건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위(單位)’란 말은, 굳이 번역하자면 ‘기관, 단체’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북경의 주택은 과거에 그 신분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다음 4가지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첫째, 붉은 담장에 황금색 유리기와로 덮인 황제가 기거하는 즈진청(紫禁城)이 그것이다. 둘째, 황실 종친과 공경대부들이 사는 녹색 유리기와의 위엄 가득한 왕푸(王府)인데, 북경 번화가로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바로 뒤에 설명할 왕푸징(王府井)은 바로 여기에서 온 이름이다. 그 다음 셋째가 바로 일반 서민들의 소박하고 실용적인 주택 쓰허위엔이고, 넷째는 최하층 노동자계급이 살었던 따자위엔(大雜院)이다. 따자위엔도 역시 하층민들이 정원을 공유하며 모여살았던 곳인 듯한데, 이에 관해서는 자료를 좀 더 찾아보아야겠다.

우리 인원이 너무 많은 관계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해 좀 아쉬웠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우리가 찾은 쓰허위엔은 전통시대의 고위급 무관이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들어서는 대문부터가 일반 서민주택과는 다른 품격을 보여주었는데, 문 바로 위로 튀어나온 4개의 조그만 원통형 나무는 이 집의 급수를 보여준다고 한다. 즉, 이것이 6개면 황제의 동생에 해당하는 황족이 살던 곳이고, 4개면 고관, 2개면 서민의 집이라는 것이다. 또한 대문 좌우의 석상은 문관과 무관을 구분해주는 표시인데, 문관의 경우엔 책모양의 석상을, 무관의 경우엔 북모양의 석상을 세우는 것 같았다. 대문으로 오르는 계단의 숫자 역시 신분과 관련있는 것이며, 대문 안에 들어서면 바로 벽이 나오는데, 이것은 외부의 바람을 막기 위한 실질적, 상징적 의미가 있는 듯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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