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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빙 중국여행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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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신묵 댓글 0건 조회 2,241회 작성일 05-07-2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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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⑤    여행 4일차 (7. 24일/일요일)

 

 

 

오늘의 일정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자의 유적지 3곳 (공부, 공묘, 공림)중 공묘와 공림을 보는 것이다.
아침을 먹고 호텔밖에 모인 우리는 걸어서 공묘를 관람하였다.

 

 

   ㅇ 공자(孔子)..................공부(孔府), 공묘(孔廟), 공림(孔林) 소개

    

 

      공자(孔子)는 중국의유가학파의 창시자이며 중국역사, 아니 세계 역사에서 걸출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이다

                     이름은 구이며 자는 중니였다.   춘추시기의 노나라 사람이었다.

 

                     몰락된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세살때 아버님을 여의고 어린시절부터 어머님과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온갖 종류의 책을 많이 읽었으며 육예를 정통하였으므로 공자의 명망은 날마다 높아져서 제자들이 점점 많아져

                     제자가 삼천명에 이른다 하였으니 짐작할만한 일이다.

 

                     40에 不惑이요, 50에 知天命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 공자는 인정(仁政)을 베푸는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56세에 송나라, 진나라, 위나라 등 여러나라를 10여년간 주유하기 시작한다.

 

                     만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는 향년 73세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부(孔府)는 공자와 직계 장손들이 세세대대로 거주했던 관저이다.

      공묘(孔廟)는 공자의 제를 드리는 사당이다.

      공림(孔林)은 공자와 그 후손의 가족들 전용묘지, 즉 가장 큰 씨족 공동묘지이다.

     

 


공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을 말하며 북경의 古宮(자금성), 대만의 대묘(垈廟)와 더불어 중국의 3대건축물로 손꼽힌다.

이는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死後에 건립하고 대유학자인 공자를 기려 제를 지내게 되었으며

중국이나 각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공자 사당의 총 본산이라고 보면 된다.

 

이곳은 처음에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의하던 행단에 대성전을 세운것으로 시작해 그후 역대의 황제가 기부나 희사를 통해

계속하여 증축하므로써 현재의 규모는 명, 청대에 완성된것으로 황궁(皇宮)에 버금가는 규모라 한다.

 

중국에서 수많은 황제들이 있지만 어느 황제도 부럽지 않은 사람이 공자님일거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 규모는 대단했으며
황제들만이 사용한다는 용을 조각하는등.... 만고의 역사에 유일무이한 위인임에 부족함이 없다는 느낌이다.

 

공묘 내부의 대부분 바닥은 벽돌을 깔아놓았으나 어디를 가던지 벽돌에는 퍼렇게 이끼가 끼어 있어 미끄러웠으나
그로인하여 공묘의 풍스러움이 더해 보였으며 여기저기 서있는 크고작은 비석들은 알 수 없는 위엄을 더하여
공묘를 둘러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분위기였다.

 

중국내에 비석이 많기로는 두군데를 손꼽는데 그 첫째가 서안의 비림이요 둘째가 공묘라는데 그 많은 비석들이 부러져있거나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었는데 그 원인은 홍위병들의 문화대혁명 피해라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었다.

 

<공묘로 들어서는 입구.....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입구에 일주문을 세우는데 반하여

  중국은 3개의 문이 나란히 서있는 형태의 문을 세우는것이 문화적 차이인듯 했다>

 

<공묘를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은 명나라때 건축물로 공묘의 대문 격이다>

 

<이어서 비슷한 유형의 門이 몇개 이어진다...>

 

<여러개의 門을 지나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자....회랑을 따라서...>

 

대부분의 구조가 門 형태의 입구를 들어서면 다리를 건너게끔 되어 있었다.

다리아래 흐르는 물도 이끼가 끼어 파랗게 보인다.   공묘내부의 돌바닥 대부분이 미끼로 미끄럽다.

 

입구를 들어서면 주건물인 대성전에 가기전에 장서, 즉 역대 황제가 하사한 서적을 소중히 보관했던 규문각과

공자가 학문을 강의했던 장소라는 행단이 나타난다.

 

<규문각(奎文閣)....웅장한 규모의 건물이다>

 

 

<행단(杏檀)...........공자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곳....우리나라 성균관에도 행단이 있다>

 

<행단앞의 조형물 역시 용의 문양을 새겨넣었다>

 

13비정(十三碑亭)... 역대 황제들이 직접 지은 시문을 새긴 비석을 보존하기 위하여 각각의 보호각을 세운것이며

금나라때 2개, 나머지는 청나라때 건축하였다한다.

아무튼 13개의 비석정들은 황제들마다 저마다 공자를 칭송하여 세우고자 하였는데
그것마저도 전국을 통일하지 못한 황제들은 여기에 세울 수 없다 하였다.

 

마침내 나타나는 대성전(大成殿)...공묘의 주건축물...제사를 지내는 장소이다.

중앙에 걸린 편액은 청나라 옹정황제가 친필로 쓴 황금편액이며 북경 자금성 태화전에 이은 제2의 대건축물이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중앙에는 역시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용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모두 26개의 돌기둥 가운데 앞쪽의 10개의 석주(石柱)에는 각각 2마리씩 용의 꿈틀거림이 조각되어 있다.

역시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용 문양이다..........중국 고대 석조예술의 걸작이라 한다.

 

대성전 내부에는 감실을 만들어 공자님을 모셨으며 양옆에는 제자와 후대의 유가의 대가들이 모셔져 있고

각종 고대 악기들도 진열되어 있다.

 

 

대성전의 뒤에는 공자의 부인인 올관씨(兀官氏)를 모시고 있는 침전(寢殿)이 있다.

 

<공묘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

 

 

 

 

황제들이 공자를 기리기 위하여 직접 시문을 짓고 글을 새겨서 세운 비석들...

큰것은 무려  65톤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나지 않는 돌을 멀리서 운반하는데 소 500마리, 사람 600명이 동원되었으나
여의치 않자 마침 겨울철인점을 이용하여 바닥에 물을 뿌려 얼음을 얼린뒤에 그 미끄러지는 마찰력으로 운반하였다 한다.

이곳 대부분의 비석들이 깨어지고 훼손된것은 홍위병들에 의한 문화대혁명 시절의 상처라니.....

 

<공자님 옛저택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지....우물>

 

<공자의 9대 직계손자 공부가 벽에 서적을 수장하여 책을 지켰다 함>

 

<공묘를 돌아보면서 문득 눈에 띄인 멋진 실루엣들...>

 

 

 

 

 

 

<목어석 좋다는 얘기는 들었는데??.......실물을 못보아서 애가 탄 님두 있었어여...ㅎㅎ>

 

 

 

 

호텔 가까이에 있어서 쉽게 걸어서 이동, 1시간 정도 공묘를 돌아본 우리는 이제 공림(孔林)은 버스로 이동하여

공자가문의 공동묘지라는 공림을 돌아보았다.

기록에 의하면 공림에는 크고 작은 무덤들이 10여만개가 있으며 묘비만도 3600여개이고 각종 건축이 40개라 한다.

공자묘는 공림의 중심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공리(孔鯉)가 동쪽에, 손자인 공급(孔伋)이 남쪽에 묻혀서

아륻, 손자와 함께 있다는 의사를 나타낸다는 해석이며 예전에는 공림을 성림(聖林)이라 불렀다 한다.

 

<공림의 대문.......지성림(至聖林)이라 씌여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기나긴 회랑이 나타나는데 좌우측은 여지없이 기념품 판매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판매상이 끝나는 곳에 다시 나타나는 성문 형식의 출입문....

  여기에는 같은 지성림(至聖林)이라 씌여있지만 지(至)자를 거꾸로 써놓았는데

  공자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의도적인 것이라 한다>

 

두번째 성문을 들어서자 비로소 공림의 내부로 들어선 셈이다.

그 안쪽은 잡상인들 없이 깨끗하고 청정한 지역으로 유지되어 있다. 깔끔한 보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일주문이나 홍살문과 달리 아래 사진같은 형태의 문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일컬어 그냥 방(坊)이라 하거나 패방(牌坊)이라고 한다.

 

<공자 묘소 앞을 흐르는 주수...... 이를 건너는 다리가 주수교이다>

 

 

이곳에도 비석이 꽤나 많았지만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파괴되는 변고를 치루었으며

간신히 붙여놓거나 복구해놓은 흔적을 발견할수 있다.

 

<주수교를 건너 공자묘를 향하여.....>

 

<문무백관을 의미하는 2개의 거대한 석상이 읍조리고 서있다....묘지의 수호신 성격이라 한다>

 

공자가 돌아가셨을때 유독 그의 제자중 자공(자공)만이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으며

그리하여 자공이 나중에 심었다는 나무......고목만이 남아있어 비석으로 이를 말해주고 있다.

공자가 죽은후 많은 제자들이 상복입고 3년상을 치루었지만 자공만이 묘지옆에 초막을 짓고 6년상을 치루었다 한다.

 

<드디어 나타난 공자의 묘.....봉분 관리는 그다지 유별나 보이지 않았다>

 

<아들 공리(孔鯉)의 묘.......공자의 묘 오른쪽에 약간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돌아나오는 길에 보니 우거진 숲속에는 제대로 관리도 안되고 버려진 무덤이나 비석, 패방들이 즐비했다.

이 설치물의 주인도 그 당시에는 꽤나 영화를 누렸을법한데.....

 

공묘(孔廟)와 공림(孔林), 공부(孔府)는 입장권 1장에 3조각을 뜯어내면서 함께 사용하도록 되어있었는데
3곳중에서 공부(孔府)는 못보았지만 공묘(孔廟)와 공림을 둘러보고 나오는 내 소감은

공자라는 역사상 위대한 사람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감회말고도

공자님이 그 가르침으로 세상을 바로잡고 중국인들은 물론 세계인들을 깨우친점도 있겠으나
궁극적으로 이 오랜 세월동안 중국을 먹여살리는것을 지켜볼때에 학문적기풍과 역사적 위인에 대한 경외심외에도
또다른 측면에서 (관광객인 나로서는) 중국과 공자의 관계가 바라보이는것이었다.

 


************** 4일차 여행 (7월 24일)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다음편에 하나 더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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