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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과 산둥반도에 관한 각종 여행정보를 나누는 곳입니다. (담당: 북경지사) 항상 여행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도움이 되는 알짜 여행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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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테마여행1] 베이징을 둘러보고, 통저우-칭둥링을 지나 청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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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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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8 22:19:22, 조회 : 2,363, 추천 : 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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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로 가는 고된 여정 |
[열하일기 테마여행1] 베이징을 둘러보고, 통저우-칭둥링을 지나 청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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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완(chogaci)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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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중국 테마여행이니 만큼 더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베이징 공항에서 기다린다. 그래도 비행기의 도착은 언제나 더디다. 한중 합작 드라마인 <북경 내사랑>의 촬영을 구경하고, 창사(長沙)에서 있을 올림픽 예선전을 중계하기 위해서 온 낯익은 취재진을 보낸 후에 반가운 얼굴들이 나온다.
실제 비행시간으로 한 시간 반 남짓인 서울과 베이징의 거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베이징 공항에 도착할 즈음에 공항 한켠에서 만난 특별기 탑승객(김정일의 수행원 그룹 쯤으로 생각됨)을 생각하면 동아시아는 이미 한 생활권에 있는 지도 모른다.
션샤하이 후통, 성급히 들른 나른한 휴식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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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션샤하이 후통의 한 사합원 건물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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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도착 시간이 지체돼 식당에 들르기는 너무 늦어서 준비한 김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시내로 진입한다. 평년보다 한 달이나 일찍 핀 미루나루 꽃가루들이 지나간 베이징의 날씨는 맑은 상태다. 두 번째 테마여행을 도와준 하늘에 감사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계절을 한 달이나 당긴 것이 실감나 적지 않게 걱정된다.
지난 테마여행은 소박한 면모를 가진 징산공원 인근의 후통을 여행했는데, 이번에는 가장 제대로 된 구조를 가진 션샤하이(什刹海) 후통을 만난다. 이곳은 옛 베이징의 고풍스러운 향을 지닌 골목으로 옛 왕족의 저택과 민가가 잘 배치된 곳이다. 특히 쑨원의 부인이자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여장부인 쑹칭링(宋慶齡)의 옛집과 문인 궈모뤄(郭沫若)의 옛집이 있는 곳이다.
특히 이 지역의 중간에 있는 션샤하이의 주변으로는 한적한 바(bar) 들이 모여 있어 동서양인들이 섞여서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바쁘게 움직이는 우리들의 부러움을 산다. 그저 다음에 오면 나도 저런 시간을 가져야지 하는 마음을 먹을 수밖에.
제법 규모가 큰 서민시장과 쓰허위안(四合院)을 둘러보고, 쑹칭링의 옛집에 들렀지만 시간이 늦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앞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만 보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저녁은 베이징의 특선요리인 취엔쥐더 카오야다. 우리 일행보다 약간 먼저 베이징에 들른 김정일도 경호와 영업으로 인해 못 들렸다는 베이징 카오야 첸먼(前門) 본점을 찾았다. 사람들은 누가 중국 요리가 입에 맞지 않는가 내기라도 한듯 열심히 식사를 한다. 호텔로 들어가 여장을 푼 후 지원자 10명 정도를 받아서 둥즈먼(東直門)의 꾸이지에(鬼街)로 가서 술잔을 기울인다.
생각해보면 어려웠지만 그래도 순탄했던 길을 통해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도착했던 박지원 일행의 여정 같다. 하지만 꾸이지에는 은유다. 연암 일행이 열하(熱河)로 간 황제의 길을 쫓아가기 위해서 통과했을 이곳에서 우리는 갖가지 풍설을 안주로 세상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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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션샤하이의 저녁 무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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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 이탁오 묘-칭둥링, 삶과 죽음은 예 있으매
아침 일찍 호텔에서 짐을 챙겨 버스에 오른다. 오늘의 일정은 무덤군들인 만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다행히 맑은 하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첫 일정은 베이징 중심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쯤 떨어진 통저우(通州)에 있는 괴짜 철학자 이탁오의 무덤이다. 이탁오(李卓吾, 1527~1602)는 중국 명대(明代)의 유학자다.
호는 탁오(卓吾). 이름은 지(贄). 별호 굉보(宏甫). 관직은 운남요안부지사(雲南姚安府知事)까지 지냈다. 당시, 전통적인 권위에 맹종(盲從)하지 않고 자아(自我) 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한 왕양명(王陽明)이 있었다. 그 분파(分派)인 '진주학파(秦州學派)'는 더욱 급진적이고, 금욕주의 ·신분차별을 강요하는 예교(禮敎)를 부정하며, 인간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본능(本能)을 긍정하였다. 이탁오는 이 진주학파에서도 가장 극좌적(極左的)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의 '동심설(童心說)'은 '독서견문(讀書見聞)'으로 물들지 않은 아동의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도가적(道家的)인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마음이 존중되어야 하고, 인욕(人慾)은 가식 없이 그대로 긍정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육경(六經)은 모두가 사서(史書)라고 보는 생각도 그에 의하면 '경사일물(經史一物)'이라 해석되어, 각 시대에 따라서 '길'도 변화하며, '지금'과 '옛날'은 등가치(等價値)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작품인 <서상기(西廂記)>와 <수호전(水滸傳)> 같은 백화(白話:口語) 문학도 '경사(經史)'와 나란히 고금을 통한 최고문학이라고 평가했다.
이른바 도학자적인 기풍을 싫어하고 불교나 도교(道敎)에 가까이하며, 머리를 깎고 불승(佛僧) 모양을 하는 등의 태도로 딱딱하기만 한 유학자(儒學者)들을 비판하였다. 또한 공자(孔子)의 시비(是非) 판단도 현재의 기준은 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시비기준을 가져야 한다며 독자적인 사론(史論)을 전개하였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도 천고(千古)의 으뜸가는 황제였다고 칭찬하고, 오대(五代) 때의 풍도(馮道)와 같은 절개 없는 인물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남녀평등론'도 주장한 바 있으며, 그의 반유교적(反儒敎的)인 교설(敎說) 때문에 자주 정부당국의 박해를 받아, 마지막에는 장문달(張問達)의 탄핵을 받고 투옥되어 옥중에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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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저우 이탁오 묘 앞에서 참가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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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 그는 자신의 책을 태워버려야한다는 의미에서 <분서(焚書)>(6권)와 묻어버려야 할 책이라는 의미에서 <장서(藏書)>(68권)라 붙이는 등 파란 많은 삶을 살다가 통저우 옥에서 자살했는데, 연암 박지원은 물론이고 이번 여행의 안내자인 고미숙 선생 등 많은 이들이 그를 숭앙하고 있었다. 열하를 3번 쯤 다녀갔지만 이탁오의 무덤을 보지 못한 고미숙 선생은 흥분된 목소리로 그를 소개한다.
반시간 남짓만에 통저우에 도착했지만 일반 여행객이 좀처럼 찾지 않은 곳이라 한참이나 헤맨 기사는 우리를 20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곳에 내려놓는다. 시하이즈(西海子) 공원의 호수 북쪽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중국 철학사의 거장답지 않게 초라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무덤 앞에서 노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자연스러운 여유가 느껴져 그는 그다지 외롭지 않은 사후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갖가지 상념 속에서 이탁오와 이별을 하고, 우리는 중국의 최전성기와 패망기를 이끌었던 황제와 여인들의 무덤이 있는 칭둥링으로 향한다. 청나라 황제들은 생전에 구궁이나 위앤밍위앤(원명원), 이허위앤(이화원)에서 살고, 청더 피슈산좡(피서산장)에서 쉬었다면 죽은 후에는 어디에 있을지 궁금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베이징에서 120여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칭둥링(淸東陵)과 칭시링(靑西陵)에서 잠자고 있다. 사후의 자금성으로 불릴 만한 칭둥링은 사실 문화적 가치는 구궁에 못지 않은데, 보존이나 일반에게 대우받는 것은 이보다 휠씬 못 미친다. 특히 칭둥링은 순치, 강희, 건륭 등 현 중국의 틀거리를 짠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만큼 그 규모나 깊이가 아주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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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둥링의 전면에 있는 돌패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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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 사후의 자금성 칭둥링
칭둥링은 준화(遵化)현에 위치해 있다. 70평방 킬로미터의 거대한 면적은 현존 최대의 능묘일 뿐 아니라 보존 상태도 상당히 양호하다. 이곳에는 순치(順治)제를 시작으로 황제 5명, 황후 4명, 137명의 첩의 무덤이 있다. 청나라의 기틀을 이룬 순치제(孝陵) 18년(1661년)때 만들어지기 시작해 강희(康熙 景陵), 건륭(乾隆 裕陵), 함풍(咸丰 定陵), 동치(同治 惠陵) 등등의 황제가 이 곳에 묻혔다.
특히 청나라의 후반을 장악한 서태후 자희(慈禧 定東陵)도 이곳에 묻혀있어, 청조의 성쇄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다. 능지역 가장 남방에는 돌패방(石牌坊)이 있는데, 이 곳에서 보면 그들이 얼마나 포근한 자리에 묻혔는 지를 알 수 있다.
황제의 능들 주변으로는 대홍문(大紅門), 성덕신공비정(聖德神功碑亭), 석상생(石像生) 등 빼어난 조각비들이 많다. 특히 건륭제의 무덤인 유릉(裕陵)은 조각 예술의 보고로 불린다. 능주변에는 8대 보살을 비롯해, 사대천왕, 오만불(五方佛) 등 갖가지 문양이 있어 그들이 사후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서태후의 무덤 조각에는 구름 속에서 용과 봉황이 춤추는 모습이 있는데, 이들 조각 가운데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건륭제든 서태후든 국가의 멸망은 그들의 사후를 지켜낼 수 없었다.
칭둥링에서 이들 못지 않은 명성을 가진 인물은 그들의 무덤을 조직적으로 도굴한 쑨뎬잉(孫殿英)이다. 국민당군 12군 군장이었던 그는 1928년 7월 한밤에 서태후의 무덤인 딩둥링(定東陵)을 시작으로 7일 동안 건륭제의 무덤 등을 도굴해 중국 도굴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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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둥링 황제 무덤 앞 상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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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 지금도 만만치 않은 옌산산맥 통과하기
칭둥링의 여행을 마치고 그날의 숙박지인 청더(承德)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우리가 이용한 버스를 여행객용 고급버스이기 때문에 청더 남쪽으로 난 옌산(燕山) 산맥의 줄기를 통과하지 못한다. 결국은 과거부터 청더의 주된 통로인 순이(順儀), 미윈(密云) 등을 거쳐서 청더로 가야한다.
아무리 빨리 걸려도 4시간은 넘게 걸리는 길이다. 무슨 일인지 골이난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면서 차를 재촉한다. 미윈을 넘으면서 사방은 어둠이 짙게 깔린다. 게다가 식사는 청더에 도착한 이후에 예정되어 배가 고프다.
참가자들의 배고픔에 대한 불만은 물론이고, 차를 세울 곳이 없어서 생리적인 욕구조차 해결하기가 힘든다. 고미숙 선생은 황제의 명을 받고, 몇일 안에 청더에 도착해야하는 박지원 일행의 모습을 설파한다.
자신을 따르던 종이 말발굽에 찍혀 다치자, 일단은 그를 버리고, 하루 밤에 수없이 많은 하천을 건너고(일야구도하기의 탄생 배경), 청더와 베이징의 옌산산맥 관문인 고북구(야출고북구기의 탄생 배경)를 지나서 청더를 향하던 연행단의 고통을 말해준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는 그들의 고통과 지금 여행의 고통의 대척점을 찾을 필요는 없기에 힘들어 한다.
다행히 순조롭게 차가 빠져 밤 11시경에 청더에 도착한다. 기사의 난폭운전에서 탈출해 생리적 욕구를 해소하고 너무 늦은 저녁을 한다. 다음날 일정은 청더 내부에서 느긋한 일정이기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식사를 한다.
끊어질 수 없어서 억지로 출동한 술좌석에는 영암에서 농업박물관장을 하시는 홍 선생님과 기자 등 3명이 조촐하게 가졌다. 참가자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조금 늦게 잠에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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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9 03:4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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