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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과 산둥반도에 관한 각종 여행정보를 나누는 곳입니다. (담당: 북경지사) 항상 여행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도움이 되는 알짜 여행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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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테마여행2] 열하의 발원지 청더를 보고, 구베이코우 장성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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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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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8 22:20:03, 조회 : 4,653, 추천 :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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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성쇠가 묻어난 열하 |
[열하일기 테마여행2] 열하의 발원지 청더를 보고, 구베이코우 장성을 넘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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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완(chogaci)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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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힘을 느낄 수 있는 피슈산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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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더 소포탈라궁 앞에 선 중국테마여행 참가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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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청더에서 하루를 더 자야하기에 사람들은 편안한 모습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거기에 날은 더없이 맑다. 다만 옌산 산맥을 기점으로 북쪽은 5도 정도는 낮은 게 보통이기 때문에 소매가 없는 옷은 추워선지 조금은 덥게 입었다. 이런 기온으로 인해 베이징의 황제들은 여름에 이곳을 찾아와 더위를 피하는 한편 주변의 평원에서 사냥을 하며, 국력을 키웠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우리는 먼저 와이빠먀오(外八廟)를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푸투오종청지먀오(普陀宗乘之廟·보타종승지묘)를 들른다. 와이빠먀오는 청더의 중심부에 위치한 피슈산좡을 중심으로 둘러싼 8개의 사원군을 말한다. 물론 8개가 넘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은 산장의 정북에 위치한 것이 푸투오종청지먀오다.
1767년(건륭 32년)때부터 건립돼, 건륭제 60세 회갑(177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은 건륭제 회갑의 기념도 있지만, 티벳에 있는 딜라이 라마 8세에 대한 경의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티벳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륭제가 라마를 위해 지었다는 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건륭제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780년 이 사원의 건립을 맞추어 청더를 방문한 박지원 일행은 그들을 한꺼번에 관찰할 수 있었다. 특히 황제도 오색 능단(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폐백을 가지고 반선(판첸 라마)을 보도록 하는데, 황제 역시도 노란 수건을 가지고 반선을 다하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란다. 조선 사신은 서번(서쪽 오랑캐)에게 조아릴 수 없다고 버티다가 황제가 그런 예를 차리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린다.
이 과정을 통해 박지원은 국제 정세는 이제 더 이상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일 수도 없고, 중국 변방의 나라라고 해서 오랑캐로 마냥 폄하하는 등 모든 정세를 중심과 주변을 고정 시켜 놓고 보는 절대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어느 곳이나 중심이고 또 주변일 수 있다는 융통성 있는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음에 만난 곳이 수미푸쇼우즈먀오(須弥福壽之廟·수미복수지묘)다. 이 사원은 산장의 북쪽에 자리하고, 정면에서 바라볼 때, 푸투오종청지먀오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건륭제 45년에 창건했는데, 주된 목적인 건륭제의 생일을 맞아 이곳을 방문하는 판첸 라마 6세를 영접하기 위해 만들었다. 때문에 사원의 모양은 티벳 시카체(日喀則·르커저)를 모방했다.
건물의 구조는 푸투오종청지먀오와 비슷한데, 가장 큰 특징은 먀오까오주앙옌뎬(妙高莊嚴殿·묘고장엄전)이다. 이곳은 판첸 라마 6세가 머물면서 독경을 한 곳인데, 1층 중앙에는 석가모니상이 있고, 주변에는 라마의 보좌 등이 배치되어 있다. 두 사원에는 라일락을 비롯한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어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오후에는 가장 중요한 목적지인 피슈산좡(避暑山庄·피서산장)에 들어선다. 이곳은 러허씽궁(熱河行宮), 청더리궁(承德離宮)이라고도 하며, 564만㎡의 대지를 차지하는데 이것은 베이징 이허위안의 2배, 구궁의 8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황가 정원림이고, 여름에 황제가 이곳에서 업무를 관장하는 한편 외국 귀빈을 맞는 등 전반적인 황궁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1703년에서 1790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총건축 면적은 약 10만여㎡에 이른다.
중국 문화 저술가 위치우위의 <천년의 정원>에는 피슈산좡에 대한 묘사가 첫 부분을 장식한다. 특히 그가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청 나라 황제들이 만리장성의 수리를 주장하는 주변의 요청을 거듭하고, 장성의 바깥인 청더에 별궁을 세운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강희제는 장성 수리에 반박하면서 “진이 장성을 축조한 이래, 한, 당, 송 역시 항상 수리를 하였는데, 그렇다고 어찌 당시인들 변방의 환난이 없었단 말인가?… 오직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국토 수호의 유일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백성의 마음이 기쁘면 나라의 근본을 얻게 될 것이니, 변경이 절로 굳건하게 될 것이다”는 논리로 장성 수리를 거절하는 한편 청더에 별궁을 세우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목란위장을 설치한다.
목란위장은 사냥을 하는 한편 군대의 진을 연구하는 장소로써 왕들에게 항상 연구하고, 신체를 단련하는 연습을 하는 장소다. 실제로 그와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치세는 청 나라가 중국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하는 한편 경제, 문화적으로도 가장 융성한 국가를 만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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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첸 라마가 강의했던 전각의 상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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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가장 중요한 여행 지역은 정문인 리정먼(麗正門)을 들어가면서부터 만나는 궁뎬취(宮殿區)다. 말 그대로 이곳은 궁전이다. 리정먼은 1754년 건륭제때 지어졌으며, 피슈산좡 최후의 관문 역할을 했다. 리정먼을 넘으면 아담한 나무로 둘러쌓인 네이위먼(內午門·내오문)이 있다. 이 문의 정면에는 ‘피슈산좡(避暑山庄)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것은 강희제가 쓴 것이다.
그 다음 건물은 건물 전체가 녹나무로 만들어져 난무뎬(楠木殿·남목전)으로도 불리는 단보징청뎬(澹泊敬誠殿·담박경성전)이다. 이 건물 역시 비교적 소박하게 느껴지는데,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접견하거나 축하 연회를 여는 곳이다. 이곳이 가장 시끌벅적했던 때는 1793년 9월 14일 영국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다. 건륭제는 그들을 맞아 이곳에서 접대하고, 서쪽에 있는 대형 행사장인 완수위앤(萬樹園)에서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대규모 연회를 벌였다. 건륭제는 호쾌한 마음에 베이징에 양행(洋行·서양은행)을 설립하고, 톈진, 닝보(寧波), 저우산(舟山)을 개방하기로 약속했다.
단보징청뎬을 지나면 쓰즈슈위(四知書屋·사지서욱)이 나온다. 이곳은 서제가 아니고, 황제가 단보징청뎬으로 나갈 때 옷을 갈아입는 장소였다. 이 건물 뒤편은 옌보즈수앙(煙波致爽·연파치상)이다. 이곳은 황제의 침전으로 황제가 일상을 보내던 곳이다. 동서 양쪽은 황후의 거실이다. 서쪽에 있는 시누완각(西暖閣·서난각)은 서태후가 거처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누완각 앞에는 배꽃이 황홀하게 피어있어 권력의 환희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강희, 옹정, 건륭제 3대의 치적은 나약한 성격의 가경제(嘉慶帝·제위 1796~1820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족은 물론이고, 소수민족의 반란이 빈번했고, 서구 제국주의 세력도 중국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유약한 치세를 거치다가 1820년 피슈산좡에서 사망했다. 아버지가 이곳에서 죽자, 아들 도광제(道光帝·제위 1821~1850)는 피슈산좡을 멀리했다.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피슈산좡은 1860년 9월 다시 시끌벅적해진다. 함풍제(咸豊帝·제위 1851~1861)가 온다는 소식이 왔기 때문이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피슈산좌으로 몽진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함께 따라가지 못하고 위앤밍위앤(圓明園)에 남아 있던 함풍제의 비빈(妃嬪)들은 이곳이 점령당하여 불길에 휩싸이게 되자 모두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렇듯 함풍제는 선조들처럼 사냥을 하면서 국력을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란을 피해 도망을 온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그의 옆에는 적지 않은 기를 가진 서태후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터무니없는 대가로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중국의 이권을 넘겨주는 조약을 체결하다가 1년후인 1861년 8월 22일 피슈산좡에서 사망한다. 이후 함풍제의 후궁이었던 자희태후(慈禧太后·후에 서태후로 불림)는 섭정의 권한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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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태후가 머물던 전각 앞에 흐드러지게 핀 배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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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사실 피슈산좡에서 궁뎬취의 면적은 그다지 크지 않다. 남은 지역은 대부분 드넓은 구릉과 평지다. 이곳을 편하게 돌 수 있는 순환차가 있어서 여행자들은 한시간 남짓이면 쉽게 돌아볼 수 있다. 중국에 익숙한 카메라 담당 호령이가 겁을 먹을 정도로 외길을 질주하는 순환차에서 산장의 전면은 물론이고 후면의 와이빠먀오도 전경을 볼 수 있어 더없이 상쾌하다.
하산 지점에서 얼마 되지 않아 있는 원진꺼(文津閣)에서 우리 일행은 내린다. 일반인들이라면 무시할 수 있지만 동양학을 다루는 이들이 사고전서(四庫全書)의 보관지 가운데 하나인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책을 베이징으로 옮겨 텅빈 도서관이지만, 과거 원진꺼를 비롯한 4곳의 사고전서 보관처는 꿈의 도서관이었다. 사고전서는 건륭제(乾隆帝)가 1741년에 천하의 서(書)를 수집한다는 소(詔)를 내려 편찬을 시작했다.
1772년에 편찬소(編纂所)인 사고전서관이 개설되었고, 1781년에는 ‘사고전서’의 첫 한 벌이 완성되었다. 그 후 궁정에 4벌(熱河의 文津閣, 北京 圓明園에 文源閣, 紫禁城 안에 文淵閣, 奉天의 文溯閣)과 민간에 열람시키는 3벌 등 7벌이 만들어졌다. 수록된 책은 3458종, 7만 9582권(각 벌의 서적 수는 동일하지 않음)에 이르렀으며,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부로 분류 편집되었다. 사고전서는 이미 베이징으로 옮겨졌지만 인문 문학을 숭상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강원대에서 한문학을 가르치는 김풍기 교수가 즉석에서 안내문의 깊은 의미를 해석하면서 흥취를 더해 준다.
황제의 야외 파티장은 완수위안(萬樹園)을 지나서 러허(熱河)의 발원지를 본다. 단지 열하라는 이름만으로 참가자들은 박지원을 만난 듯 기뻐한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도 얼지 않는다고 해서 열하로 불리는 이 작은 수원지는 박지원이라는 당대의 기록자를 만났기에 한국인들에게는 각인된 곳이다. 호텔에 돌아와 세미나실에서 열하일기와 고미숙씨가 이끄는 ‘수유+너머’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안한 자리에서 세미나를 하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 이제는 어제 밤의 악몽을 잊은 듯 여유가 생긴다.
어제와 같은 골목에서 시작된 술자리에는 10명 남짓한 이들과 나중에 합류한 수유연구실 10여명이 합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다. 술자리의 소재는 역사보다는 현재다. 이틀만 돌아 봐도 질리는 거대한 땅. 또 좀체로 지칠 것 같지 않은 13억의 인구가 주는 압박. 하지만 축구의 공한증과 우리의 힘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갖는 게 술자리의 미덕이다.
장성 원형 간직한 쓰마타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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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전서 보관지 가운데 하나인 문진각에서 사고전서를 이야기하는 김풍기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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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이제 다시 그제의 악몽이 서린 베이징 방향의 길로 가야 한다. 판첸라마에 대한 공경을 표하지 않는다고 황제에게 힐책을 받고, 쫓겨나듯 귀국길에 접어든 박지원 일행의 마음도 이렇듯 시원섭섭했을 거라는 생각으로 버스에 오른다. 봄볕이 돋아나는 옌산의 줄기에는 아직 초목이 무성하지 않다. 여름철에 접어들면 정말 이쁜 모습인데, 다음번에 기회가 있는 이들은 여름에 옌산산맥의 줄기를 돌아보길 권한다.
옌산의 중부를 관통하는 구베이코우는 동쪽으로 쓰마타이창청(司馬台長城)이 있고, 서쪽으로 무톈위(慕田峪) 장성, 빠다링(八達嶺) 장성이 있다. 보통 여행자들이 들르는 곳은 빠다링 장성인데 이곳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복원시킨 곳으로 장성의 원형이 있는 곳은 아니다. 반면에 쓰마타이 창청은 인위적인 복원을 거치지 않은 곳이다. 이곳은 만리장성의 모든 특징을 한곳에 모아 놓은 듯하여 ‘장성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장성(長城)은 중국 건축물의 최고로 꼽히며, 이 중 쓰마타이창청은 중국 장성의 최고로 손꼽힌다는 말이 있다. 산이 높고 가파르며, 지형이 험하여 공사가 아주 힘겹게 이루어졌다. 쓰마타이창청의 가장 험한 곳은 ‘시엔뉘로우’(仙女樓)와 ‘왕징로우’(望京樓)로 통하는 길목이다. 높이가 100여m에 이르며, 경사도는 85도로 거의 수직이며, 유일한 길목이다. 계단이 발 하나 간신히 올려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작으며, 양쪽으로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쓰마타이창청의 최고 지점에 오르면, 동쪽에는 눈처럼 쌓인 구름이, 남쪽으로는 화북명주(華北明珠·화북 지방의 아름다운 진주)를 감상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호랑이가 누운 듯하고, 북쪽으로는 겹겹이 쌓인 푸른 옌샨(燕山)을 볼 수 있다. 더러는 몸이 힘든 분이 있지만 걸을 만하다는 기자의 말을 믿고 올라간다. 물론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장성을 체험했다는 기쁨에 한껏 상기된 모습으로 아래서 만날 수 있었다.
오늘 길에 바이롱탄(白龍潭)에 들른다. 바이롱탄은 미윈의 아름다운 산 가운데 하나다. 베이징 10경 중 하나로, 물이 맑고,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소나무가 아름다우며, 송대 이후에 지어진 각종 정자 등이 잘 배치되어 있다. 바이롱탄은 베이징에서 청더(承德)로 가는 길에 있는데, 때문에 피슈산좡으로 행차를 떠나던 황제들이 들러서 쉬기도 한 곳이다.
입구에 있는 롱추엔스(龍泉寺)의 대웅전 옆에 세워진 척계광(戚繼光) 석비를 보고, 김풍기 교수는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이순신 장군, 조선조 무협의 대가 백동수의 사적을 연결해 흥미를 더한다. 사실 바이롱탄 수원지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다만 이곳 등지에서 시작된 물이 미윈저수지를 이룬다는 점을 생각하면 베이징인들에게는 남다른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미윈저수지가 없다면 북경의 규모가 커지는 데는 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지금도 미윈저수지는 가장 중요한 상수원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도착해 호텔에 여장을 푼다. 많은 아쉬움이 있는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오늘 저녁 술자리는 꼭 참석하겠다고 벼르는 이들이 많다. 그 가운데 베이징에서 풍력발전기 관련 사업과 대북지원사업을 하는 한 지인이 참가자들 중의 한사람과 연결되었다. 결국 그 형의 제안으로 야윈춘(亞運村·아시안게임의 중심지이자 2008년 올림픽의 중심 지역)의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술자리가 이어진다. 기자는 아카시아 향기와 술과 원만하게 일들을 진행하지 못한 마음이 겹치면서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후회가 더 많았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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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허(열하) 발원지 앞에서 자리를 잡은 여행 참가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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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마지막 날이다. 날이 흐리다. 아침 일찍 톈안먼 광장을 시작으로 구궁을 돌아본다. 구궁은 산자들이 통치를 했던 곳이다. 막 움이 돋아나는 후원에서 느끼는 봄이 편안하다. 리우리창(琉璃廠)을 보고 싶다는 이들이 많아서 서둘러 그곳에 들른다. 과거의 영화는 간데 없고, 상업성만이 남아서 명성을 잃어버린 지역이다. 그래서 안 보였으면 싶었는데, 국민일보 문일 부장은 오랫동안 구하던 책을 ‘중국서점’에서 구했다며 좋아한다. 그런데 밖에는 서서히 비가 오기 시작한다.
서둘러 신위앤리(新源里)에 있는 북한식당 해당화로 향한다. 더러는 북한 사람을 처음 본 이들이 있어서 적지 않은 경계심도 느껴진다. 하지만 단맛이 조금 강할 뿐 우리와 차이없는 식단과 무대에서 흥겹게 노래 부르는 복무원들의 친근함에 참가자들은 모두 흥을 낸다. 음식과 더불어 곁들인 ‘들쭉술’로 인해 기분이 들뜬 참가자들이 밖으로 나오자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예정대로 이허위앤을 갈 것인가, 서둘러 공항으로 갈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공항으로 향한다. 적정한 아쉬움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에.
참가자들이 티켓팅을 하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톈진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전번에는 내가 서비스맨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마음이 위축된다. 그래도 계속 비는 내린다. 나 보고 그 자리에 있으라는 소린지, 가라는 소린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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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마타이 장성은 보수를 하지 않아서 역사의 맛이 살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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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창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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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인터넷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코멘트 부탁드려요. |
2025-02-09 04:5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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